나는 [오버워치]를 플레이하기 전에는 소위 여성 게이머들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아기자기한 게임 - 귀여운 캐릭터와 일러스트가 특징인 - 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오버워치]에 빠지게 되어 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FPS 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팀 음성 채널에서 보이스를 켜고 내 목소리를 온전히 낼 때 덜덜 떠는 바람에 목소리가 마구 요동쳤던 기억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고전 FPS 영역에서 경험을 쌓아온 남자 게이머들보다 실력이 밀린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내가 그 껍데기를 깨고 나온 계기는 다른 여성 게이머들과 함께 게임을 즐기며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공격적인 역할군을 맡게 된 경험이었다. 여성 게이머의 유리천장을 뚫는 건 무척이나 고된 시간이었다. 본인의 마음에 내재된 불신과 외부의 시선을 함께 맞받아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대다수의 남성 게이머들보다 게임을 훨씬 잘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윤태진, 김지윤 작가의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는 게임판의 고질적인 성차별 문제를 게이머의 시각, 게임 내 캐릭터의 시각, 그리고 게임 산업계 종사자들의 시각으로 나눠 파악한다. 복잡한 학문적 이론이나 논쟁거리를 가져오기보다는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들에게 익숙한 일련의 사건들을 쭉 훑어보는 식으로 흘러가는데,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러한 사건에서 어떤 논의와 발전을 모색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도록 한다. 뭇 게이머들은 이러한 논의가 남성과 여성의 불화와 갈등을 더욱 심화시킨다고 주장하지만, 본 책에서 하는 논의는 건전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관문과도 같다. 누구보다도 공정한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일관되게 비판받는 쪽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명확한 변화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사건에 대해서 나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 또한 진성 게이머들의 판에 뛰어든 한 명의 여성 게이머이고, 게임 업계의 트렌드를 따라가며 온갖 논란과 사건사고를 팔로업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애정을 갖고 있는 분야에 대한 내용이라 좋았던 것 같다. 게다가 이미 알고 있던 사건들임에도 핵심을 잘 정리해두어 지루하지도 않았다. 게임 산업의 변화를 반추하며 유달리 파급력이 컸던 몇 사건에 대해 읽다 보면 그 시절의 내가 했던 생각들도 절로 떠오르곤 했다. 지금 다시 입 밖으로 내뱉자면 부끄러울 만한 생각들이 대부분이다.
그동안 나는 게이머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왔다. 진성 게이머의 시각에서 편견 어린 시각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복제하다가, '나를 과연 진지한 게이머라고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의문을 가지며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하고, 결국 게임판에서 존재하는 차별을 묵인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게임 산업에 깊이 뿌리내린 구시대적 관행을 솎아내기 위해 소소한 노력을 하고 있다.
본 책에서 말했듯이 폭력적인 게이머는 어떠한 정형이다. 게이머는 수없이 많은 얼굴을 가질 수 있다. 폭력적인 게이머인 동시에 평화로운 게이머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 수많은 여성 게이머들이 일방적으로 폭력적인 언사를 겪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디 많은 게이머들이 이 책을 읽고 더 나은 게임 문화의 향유 방향을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좋아하는 문화를 함께 즐길 사람이 늘어나는 건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 뉴비를 배척하는 게임보다 두 손 두 발 들고 환영하는 게임이 더욱 오래 살아남는 것은 자명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