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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

[도서]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저/이세진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3개월이란 시간차를 두고 동일한 승객을 태운 채 도착한 두 비행기'라는 소재는 무척 흥미로웠다. 아쉬웠던 건 해당 책이 언급된 글을 스쳐 지나가듯 읽은 탓에 작가의 이름도, 책의 제목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후로도 가끔 이름 모를 그 작품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래서 두 비행기가 각자 태우고 온 승객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일까? 만약 내가 해당 비행기의 승객이었고, 또 다른 나를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어떻게 생겨났든 실재한다면, 그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어떠해야 하나? 상상을 이리저리 뻗치다 보면 이런저런 의문이 들쑥날쑥 솟구쳐 올랐고, 결국 나는 책을 찾아내서 이 끝없는 질문의 고리를 끊어내기로 했다(처음부터 글을 꼼꼼히 읽고 메모를 할 걸 그랬다).

 

 

 

  에르베 르 텔리에 작가의 [아노말리]는 비행 중 난기류를 만난 항공기가 의문의 사건을 겪으며 벌어지는 혼란을 그려낸 이야기이다. 해당 비행기는 원래 일정대로 무사히 도착한 3월의 비행기와, 이상기류 속에서 3개월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도착한 6월의 비행기로 나뉘게 된다. 일종의 분기를 겪은 셈이다. 문제는 비행기가 복제된 것처럼, 비행기에 탄 승객은 물론 승무원과 기장까지도 전부 복제된다. 한 쌍의 '나'들을 구분할 수 있는 건 3개월간의 공백이 만들어낸 미세한 차이뿐이다. 둘은 서로의 복제품이기 때문에 소름 끼치도록 똑같은 생각을 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행동한다.

 

  소재만으로도 재미있지만, 이 사건에 얽힌 사람들이 무척 다양해서 지루할 틈도 없다. 우리는 먼저 예정된 날짜에 내려 아무런 혼란 없이 그동안 영위해온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인종과 계급에 속해 있고 성격도 천차만별이라 각기 다른 삶을 훔쳐보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통통 튀는 개성이 처음부터 각 인물의 캐릭터를 단단히 다져놓기 때문에, 각자의 도플갱어와 만나는 매우 기발한 전환점에서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몇몇은 파국에 이르고 몇몇은 큰 변화 없이 심심한 삶을 이어가며, 몇몇은 아주 큰 전환점을 맞는 과정이 작위적이지 않고 오히려 현실적이라 작품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본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분기'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처음에는 정녕 이 허무한 이론이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동의한 가설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생체 3D 프린터기 음모론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해당 이론을 곱씹다 보니 이것이 우리의 현실에도 적용되는지와는 관계없이 무척 재미있는 상상이라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어떤 초월적 존재가 분명 자신이 둘이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난기류를 가장해서 거대한 복제쇼를 실험해 본 거라면? 마치 프랑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처럼 말이다(해당 영화에서 신은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인 이웃집 아저씨이다). 사실 [아노말리] 또한 작가의 거대한 사고 실험이므로, 작품 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꽤나 똑똑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말 유쾌한 상상이 아닌가.

 

 

 

  결국 나는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나의 도플갱어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고, 세상은 어떤 혼란에 빠질지 걱정한다. [아노말리]는 도플갱어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세상이 누군가의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 작품은 두 명의 명석한 박사가 완성한 재난 프로토콜 42에 의해 진행되었지만,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프로토콜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어떠한 특이점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며 사회는 어떻게 바뀌는지를 치밀한 상상력에 기반해 현실적으로 풀어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노말리의 여파를 따라가는 동안 순수한 즐거움의 파도를 타면 된다. 복잡한 생각과 관측은 작가가 다 해주었다. 이야기 속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그것이 변칙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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