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선량한 차별주의자

[도서]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고등학교 때 실력을 키우고 싶어서 수학학원에 갔다. 원장 선생님은 불같은 성격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타입이었다. 수학을 못하지도, 잘하지도 않는 평범한 나는 열심히 노력했다. 노력해서 현재보다 더 탄탄한 실력을 갖추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원장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다. 여자애들은 남자애들보다 수학을 못 해.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야. 그러니까 너무 아등바등 노력하지 않아도 돼. 그 말은 내게 꼭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너는 한계가 정해져 있어. 아쉽게도 그건 네가 여자로 태어난 탓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여자애들은 남자애들보다 수학을 잘할 순 없다, 고.

 

  이제는 잘 안다. 태생적으로 남녀의 수학 능력은 큰 차이가 나지도 않을뿐더러 보통 근거로 제시되는 성적 수치는 사회적 맥락을 깡그리 무시한 채 원인과 결과를 섞은 엉터리 주장이라는 것을. 하지만 '진리'를 가장한 그 말은 내 무의식에 흔적을 남겼고, 가끔은 스스로를 불신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었다.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진리이다.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사회에 팽배한 차별을 예리한 눈으로 짚어낸다. 다양한 범주의 차별을 끄집어내고, 여러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주며 우리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우리 몫의 삶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스스로가 깨어 있으며 다른 이들의 부당함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의로운 인간이라는 믿음, 자신감, 혹은 자기 기만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상대를 배척하는 두 얼굴의 괴물, 즉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만든다는 사실은 사뭇 충격적이지만 사실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차별하는 사람보다도 까다롭다. 본인 스스로는 차별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장애 인권 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면서도 장애인들의 지하철 파업을 불쾌하게 받아들이거나, 여성 인권 신장에 동의하면서도 여성이 가사노동보다 본인의 자아 성장에 더 노력을 기울이면 비난을 하는 등의 모순적인 행동이 나타나는 이유이다. 나 또한 책을 읽으며 내가 했던 모순적인 행동을 떠올리고는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동안 스스로를 아주 많이 깨어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런 생각을 버렸다. 아무리 많은 소수자성을 지니고 있다 해도, 복합적인 경계가 교차하는 사회에서는 나 또한 순식간에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위험을 인지하고 있는 것과 눈 가리고 아웅하며 경각심을 내다 버리는 것 둘 중에 무엇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태도일까?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다양한 종류의 차별에 하나씩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것들의 뿌리를 훑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차별의 범주를 가시화하고, 그럼으로써 그동한 보지 못했던 차별을 현실로 인식하게 된다.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따라가는 동안 우리의 순탄했던 일상은 여러 번 흔들리지만, 그것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흔들림이다.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을 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말은 책의 주제를 관통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선량한 평등주의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알지 못했던 차별의 세상을 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러한 세상을 마주하는 순간 받아들이고 바뀌려고 하는 것이다. 변화란 항상 어렵다. 익숙한 일상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면, 곧 익숙함과 편안함은 누군가를 차별함으로써 이뤄낸 것임을 깨닫게 된다면, 그런 기반에서 편안히 두 발 뻗고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혼자서 깨닫기 어렵다면 이 책처럼 훌륭한 길잡이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모쪼록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차별 적은 세상이 되기를.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YBLOGWEB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