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 설계사무소를 다녔던 나는, 제시간에 퇴근하는 게 쉽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심지어 현상설계나 프로젝트 하나를 시작하면 집에 가는 건 더더욱 쉽지 않았다. 힘들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네 업무가 다 그런 거지 했었다. 회의할 때마다 깨지고,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어도 일을 배우기 위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게 죽을 것 같았는데, 참 이상하다. 둘째 아이를 낳고 다시는 회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슬펐다. 회사라는 곳에서 소속감을 느끼는 일은 이제는 없겠구나 하는, 묘한 기분. 회사라는 건 그런 것 같다.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은 곳이지만, 취직하기 전까지는 미치도록 정규직이 되고 싶은 곳.
대학 때 연극 동아리에서 연극배우를 꿈꾸던 연희는 4학년이 되자 연극배우의 꿈을 잠시 뒤로 하고 취업을 결심한다. ‘드림출판사’에 인턴으로 취직한 삼 개월 후, 연희는 악명 높은 팀장이 있는 키즈 콘텐츠 1팀으로 발령이 난다. 이 부서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정규직이 되지 못한 동기들을 생각하며 일을 한다. 연희에게는 대학 친구 장미와 연인 종민이 있다. 장미는 같이 연극을 한 친구다. 자신은 현실에 타협했지만, 장미는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모습이 한심한 듯하면서도 부러움을 느낀다. 사귀고 난 후, 십 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가 있는 종민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달려와 준 사람은 종민이다. 힘든 회사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갈 무렵 키즈콘텐츠 1팀이 기획한 아동전집이 대박 난다. 대박에 힘입어 전집이 홈쇼핑에 론칭을 하게 되지만 별책부록으로 제공한 퍼즐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아도 필요하다면 삼킬 수 있는 이가 어른이었다. (44)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걸 참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건지. 좋은 건 좋은 거고, 힘든 건 힘든 건데. 좋아하는 마음이 아무리 커도 고통스러운 상황이 해결되거나 나아지는 건 아니잖아. 이러다가 무대를 좋아하는 마음까지 다 소진해버리면 나중에 뭐가 남는 거지? 뭔가를 좋아하고 갈망하는 마음이 때로는 형벌 같아. 나는 벌을 받기 위해 이걸하고 있는 게 아닌데. (306)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이 오십이 넘었다고 해서 내가 진정 어른이 되기는 한 것일까? 나는 좋아한 일에 대해 완주를 하지 못했다. 건축공부를 하고 싶었고, 그래서 했고, 그와 관련된 회사에 취직했지만, 아이를 키우기 위해 회사를 그만뒀다.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결혼을 선택하지 않을 것 같다.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는 게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이라면. 아니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하지 않은 선택이 더 좋아 보이지 않을까? 인생이라는 것도, 어른이 된다는 것도 다 그런 것 같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혹은, 못했던 것에 대한 동경과 후회가 뒤섞이는 것.
인생이라는 무대는 그렇다. 입장하는 순간 퇴장하고 싶지만 퇴장할 수 없고, 어떻게든 내가 그 무대를 꾸며야 한다는 사실. 타인의 정답에 따라 흘러갈 수 없고, 오로지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내 생각대로 극본을 써야 하는, 내가 주연인 1인극. 어떻게든 내 인생은 굴러왔고, 살아간다. 이제 20대가 된 아이들을 보며 이 녀석들은 자신의 무대를 어떻게 꾸미고 어떤 극본을 쓸지, 걱정되면서도 기다린다.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 무대를 만들어 갈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좌절하거나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른이 되는 건 누구든 힘들고 아프지만 그렇기 때문에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면 좋겠다고. 세상 모든 단짠 청춘들이여.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