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다.
작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가제본블라인드 서평단으로 호수의 일을 읽어보았다. 작가가 누구일지 정말 궁금했었는데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그 유명한 『푸른 사자 와니니』 시리즈의 저자 이현이라니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작가라 놀라움과 반가움은 배가 되었다. 둘째가 초등학교 시절 『푸른 사자 와니니』로 온 책 읽기를 하고 학교에서 작가를 초정해서 강의를 들었기에 이 책이 나름 둘째에게는 소중한 기억의 책이기 때문이다. 아동문학에서 이젠 청소년 문학으로 폭을 넓힌 작가의 작품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외부에서는 평범한 학생으로 생활을 하지만 가정에서의 또 다른 모습으로 지내는 호정이가 이 『호수의 일』의 주인공이다. 호정이가 의사에게 상담을 받으며 가족들과 호수로 놀러 가 꽝꽝 언 호수에서 자신만 끝까지 썰매를 타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호정은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중으로 학원을 다니지 않고 인강으로 공부를 하며 수시보다는 정시를 목표로 공부를 한다.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해 보이는 호정이지만 마음 한구석엔 어린 시절 부모의 사업실패로 할머니 집에 떨어져 지내며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원망했던 아픔의 판도라 상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전학 온 강은기와 친해지면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 대한 마음이 특별해졌고 호정은 은기와 함께 하는 시간이 따뜻하고 설레였다. 하지만 은기에게도 함부로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 상자가 있음을 호정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차에 짓꿏은 아이들에 의해 가정폭력과 관련된 아버지가 죽은 사건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결국 은기는 학교를 떠나게 되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된 듯이 호정이는 기말고사에도 집중을 못하고,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더 커지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절친들도 성가시게 느껴져 다투게 된다. 그러다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은기의 과거사를 들쑤신 거라 짐작되는 아이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학교를 뛰쳐나간다.
처음엔 부모의 입장에서 책을 읽었기에 나와 너무 다른 학창시절을 보내는 현재의 평범한 고등학생들의 일상이 나에겐 낯설게만 느껴졌다. 남자애들만 키워서 그런지 화장을 곱게 하고 등교를 하고 민낯으로 밖을 나가는 걸 싫어한다는 여자아이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에 화장을 안 해도 예쁠 텐데라는 말을 속으로 되내이고, 커플이 되고 기념일을 챙기는 것에는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 텐데라는 생각을 하니 내 나이를 속일 수 없고 꼰대가 된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의 마음 깊숙이 들어가 내가 10대가 된 것처럼 읽고 있었다. 호정에게도 아직 자신의 과거를 편하게 털어놓지 못해 간혹 당혹스러워하던 은기가 결국 자신의 과거사가 밝혀지게 된 상황, 호정이가 부모님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아픔들이 하나둘 내 마음에 박히며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구김살 없이 귀여운 동생 진주를 보며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그 시절 받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진주에 대한 질투라는 양가감정을 가진 호정은 그런 속내를 누군가에게 제대로 말해 본 적이 없다. 친구들과도 격이 없이 잘 지내지만 부모님과의 관계는 오히려 남보다 못하다. 잘 울지 않는 호정이 처음으로 편하게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은기가 사라지고 은기에게 묻고 싶고 하고 싶은 말들이 계속 마음속에 쌓여가기만 했다. 과거와 현재의 아픔을 그냥 덮어 두다 결국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호정은 상담을 받으며 순서 없는 기억의 서랍들을 하나하나 열어 호수의 일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 순간 나는 또한 알았을 것이다. 박인석이 뭔가 내가 은기에게 물을 수 없었던 것들을 알고 있다 는 사실을
인간은 어째서 모르면 좋은 것을 그냥 덮어 두지 못할까.
나는 그것을 물으면 은기가 뒷걸음치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윤기에게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내내 묻고 있었던 것이다.
박인석의 손에 온기를 물어뜯을 괴물이 든 상자가 있었다. 나는 박인석이 상자를 열까 봐 겁이 났고 또한 그 안에 든 것이 궁금했다. 그 잠깐의 망설임이었다.
정말로 치명적인 것은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이름 모를 바이러스나 천박한 호기심 같은 것들은. (p.210)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아픈 나가 아닌 그냥 나일까.
아픈 나와 그냥 나가 주연 자리를 두고 다툼을 벌이는 중인 것 같다. 더 이상 격렬하지는 않은지도 모르지만
비로소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과 함께 그 아이가, '아픈 나'가 달라진 걸까. 그 애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p.302)
마음은 모르게 찾아와 명백하게 떠난다. 눈물이 솟았다. 참지 않고 두었다. 좋은 것을 잃었을 때는 좋았던 만큼 슬플 수밖에 없다. 슬픔은 다하고서야 비로소 다해질 것이다. (p.345)
10대의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루며 내면의 심경 변화를 잘 그려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부모의 보살핌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일깨우기도 하고 첫사랑의 애틋함과 아픔도 잘 그려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어서 더 이야기가 풍성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아픔이 되어 마음속 깊이 꼭꼭 숨겨놓았던 호정이가 이제라도 하나둘 마음의 빗장을 열어나가길 응원한다. 그리고 은기와의 아쉬운 이별에 대한 아픔도 크겠지만 훗날 성숙해지는 일련의 과정 중 하나였다고 느끼는 날이 오길 바란다. 호정에겐 가족, 친구들, 선생님이 든든하게 옆에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얼어붙은 호수가 깨져 행여 지금까지 잘 숨겨온 자신의 아픔이 드러날까 두려워했던 호정이가 이젠 따스한 봄날의 햇살로 서서히 호수의 얼음이 녹은 고요한 호수가 더 안전하게 느끼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가제본서평단으로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