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너무나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설국』.
몇 해 전부터 난 저 긴 터널을 여러 번 빠져나와 하얀 밤 바닥을 수차례 봤지만 완독을 못 했었다. 매 겨울이면 완독해야지 마음만 먹고 있다 올겨울 유독 폭설의 소식이 잦아 다시금 『설국』을 생각하던 차에 고전살롱 1월 책으로 선정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고전살롱에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된 작품이기에 더 애착을 가지고 마주했다.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별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머언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p.40~41)
니카타 현의 에치고 유자와 온천을 배경으로 계절의 변화에 따른 대자연의 풍경과 대비되는 무의미한 인간사를 보여준다고 소개되는 이 소설은 작가가 단편들을 다듬고 엮어 13년 만에 중편소설로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한다.
서양무용에 대한 글을 쓰며 무위도식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시마무라, 게이샤인 고마코와 신비로운 매력을 가진 요코가 주된 등장 인물이다. 고마코는 단순한 여행객이자 가정이 있는 시마무라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매우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고마코는 열정을 담아 시마무라에 대한 사랑을 키워보고 싶다가도 언젠가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그만인 사람에게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것에 갈팡질팡한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있지만, 기차에서 우연히 눈이 갔던 요코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계속 허무함으로 생각을 마무리하는 한량 시마무라도 참으로 불편한 인물이지만 고마코와 요코의 관계도 참 요상하다. 고마코의 약혼자인 유키코의 새 애인이 바로 요코이다. 그리고 병에 걸린 유키코의 요양비를 위해 고마코는 게이샤가 된 것이다. 요코는 유키코가 죽고도 여전히 그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의 묘를 매일 찾는다. 나의 시선으로는 이해 불가지만 사랑과 책임감의 적정선을 누가 정의할 수 있겠는가? 작가가 이 소설을 쓰던 당시 사회적 통념이 여자는 그래야 하는 거였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 소설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연출은 얌전하던 요코의 몫이었다.
아득히 먼 산 위의 하늘엔 아직 지다 만 노을빛이 아스라하게 남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먼 곳까지 형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색채는 이미 다 바래고 말아 어디건 평범한 야산의 모습이 한결 평범하게 보이고 그 무엇도 드러나게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오히려 뭔가 아련한 커다란 감정의 흐름이 남았다. (p.12~13)
여관 주인이 특별히 꺼내준 교토산(産) 옛 쇠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p.134)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 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 뿐 아니라, 군데군데 광운(光雲)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p.142~143)
특별한 스토리보다는 감정과 심리변화 그리고 자연경관의 묘사를 일품으로 뽑는다는 이 작품을 한 번 읽고 그 진가를 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클래식 클라우드를 통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삶을 돌아본 후 재독을 했다. 하지만 재독을 하면서 이들 사이의 대화가 동문서답으로 끝나고 고마코의 돌발적인 행동과 허무주의를 난발하는 시마무라를 소화하기 힘든 건 그복하기 힘들었다. 일본의 문화적 풍습과 자연풍경에 대한 정보가 더 많았다면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좀 수월했을까? 작가가 단편들을 모아 중편을 만들지 않고 그냥 단편들로 두었으면 오히려 단편이 갖는 특수성으로 이 작품을 더 높이 평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수려한 경관을 그려낸 여행 에세이였다면 어땠을까?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다는 것은 인정하겠으나 13년의 수고가 담긴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대표작인 『설국』에 후한 점수를 주진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