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말이다. (p.6)
‘시’ 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다. (p.7)
이 책은 ‘인간이라는 직업’(알렉상드르 졸리앵)을 가진 모두를 위한 것이니까. (p.9)
신형철 작가는 ‘내가 읽은 시’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겪은 시’라며 서두를 연다. 확실히 처음부터 확 끌리는 필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니 이 책을 마주하는 내가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답이 있기는 하되 그것이 질문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적어도 시에서는 그렇다. 위대하다는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그들의 답에 놀라본 적이 별로 없다. 그 답은 너무 소박하거나 반대로 너무 거창했다. 그러나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p.87)
천사가 껴안으면 바스러질 뿐인 우리 불완전한 인간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자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에게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신의 빈자리가 될 수 있을 뿐. (p.90)
윤동주의 '최후의 나'는 등불을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1945년 2월 16일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그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어정쩡한 표현에는 아직 인생을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다는 겸손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시를 쉽게 쓴 것이 아니라 인생을 어렵게 살았다. 자신을 넘어서려는 노력, 결국 '최후의 나'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것이 그를 죽게 했고 영원히 살게 했다. 이제 나는 그의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나에게 읽어준다. '시는 쓰기 어렵다는데 인생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p.175~176)
카프카의 문학은 "인생이라는 화마를 잡기 위한 '맞불'"(「극지의 시」이라는 것. 산불이 났을 때 불이 진행되는 방향의 맞은편에 마주놓는 불이 맞붙이고, 두 불이 만나 더는 탈 것이 없어 불이 꺼지도록 하는 게 맞불 작전이다. "하나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임의의 다른 절망을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라는 불에 대해 문학은 맞불이라는 것. 그렇구나. 나를 태우는 불을 끄기 위해 나는 타오르는 책들을 뒤적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 (p.211)
시를 좋아하지 내가 제대로 시를 이해한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투성이인 나에겐 시에 대한 해석을 담은 글귀들은 이런 나의 갈증을 풀어준다. 시라고 하면 뭔가 신비감 속에서 감춰진 무언가를 찾아내야 할 것 같은데 신형철은 이런 시를 아주 친절하고 상세히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비유해 풀어준다. 감히 혼자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아주 넓은 스펙트럼의 시를 펼쳐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솔직히 말하면 신형철 작가님의 책 중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는 책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일 뿐이다. 그의 문학평론 집은 사실 읽었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가진 문학적 수준으로 따라갈 수 없었다는 말이 정확하다 할 수 있다. 그러니 그의 4년 만의 신작인 『인생의 역사』가 시를 이야기한다고 하니 사실 이걸 내가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 반 기대 반이었고 도전 정신으로 읽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이 도전은 기대 이상의 만족과 함께 인덱스를 붙이다 붙이다 이건 재독을 꼭 해야겠다 다짐하며 감탄과 경이로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