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프리카 잔지바르 출신이자 난민이며 이슬람교도인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대표작 『낙원』. 2021년 노벨 문학상 수상 후 이 책을 사 놓고 장식용 책으로 보관하고 있었는데 문학살롱을 통해 드디어 읽어보게 되었다. 다들 낯설다고 하니 나도 단단히 마음먹고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유수프는 12살의 나이에 상단의 거상 아지즈 아저씨를 따라 집을 나서 그의 가게에서 일하게 된다. 그곳엔 이미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부모의 빚을 대신해 볼모로 와있던 칼릴과 지내며 그 집 정원에 애정을 쏟는다. 특별한 것 없던 그의 일상은 내륙으로 떠나는 행상길에 동참하면서 변화가 일어나지만, 본격적인 내륙 진입 전 하미드의 상인에게 맡겨진다. 일 년 후 16살의 유수프는 다시 상단에 합류해 험난한 행상길에 오른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아지즈의 집으로 돌아와 칼릴과 낙원 같던 그 집의 정원을 마주하게 된다. 정원을 가꾸던 유수프를 눈여겨 보던 아지즈의 아내 줄레카의 부름 덕분에 칼릴의 동생이자 아지즈의 후처인 아미나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아미나에게 이곳에서 도망치자고 말하지만 아미나는 그런 그를 몽상가라고 말한다. 유수프는 줄레카로 인해 궁지에 몰리지만 아지즈는 그를 의심하지 않고 용서한다. 하지만 평화롭던 마을에 독일군이 몰려오며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결말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낯선 동아프리카의 낯선 언어와 문화에 주석까지 참고해야 하니 완벽한 몰입이 힘들었다. 아프리카를 단순한 이분법으로 생각했던 나의 무지로 인해 이런 다양한 인종과 종교를 머릿속에 그려보기가 쉽지 않았다. 작가가 살았던 잔지바르 때문에 소설의 시작 배경인 가공의 소도시 카와가 잔지바르에 있다고 착각하며 읽었으니 나는 소설과 다른 공간에서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무지와 오해를 중도에 알아채고 다시 정신 차리고 읽어보자 했지만 역시나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유럽 강국의 식민지 쟁탈전 속에 핍박받는 사람들, 종교적 갈등, 인종 갈등 등 19 ~20 세기의 동아프리카의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그만이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낙원’이라는 제목과 달리 전혀 낙원과 거리가 멀었던 그 시절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낙원은 과연 있었겠느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천국과 지옥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데 나는 나만의 자유의지로 만족하며 낙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글쎄 안일한 생각일 수 있지만, 꼭 낙원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지옥 같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만으로도 낙원이라 생각하며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사람들이 넌 내 것이다. 나는 너를 소유한다고 할 때, 그것은 비가 지나가는 것이나 하루의 끝에 해가 지는 것과 같은 거야. 그들이 좋아하든 말든 다음 날 아침 해는 다시 뜬다고. 자유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너를 가두고 쇠사슬로 묶고 네가 가진 하찮은 것까지 모두 남용하지만, 자유는 그들이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야. (p.292)
떠남, 고난, 구원의 종교적 서사를 담은 유수프(요셉)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에게 기대해보는 마지막이 구원으로 끝나지 않아 뭔가 이야기를 하다만 듯한 아쉬움도 있지만, 이 또한 작가의 큰 그림이라 여거진다. 사실 잘생긴 유수프에 대한 환상 없이 읽었더니 설렘은 없었지만, 모든 것에 달관한 성인군자처럼 덤덤한 유수프의 그런 면은 부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덤덤한 유수프라지만 이성을 향한 관심에선 덤덤하지도 초월하지도 못한 그의 모습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는 건 안 비밀이다. 억압에서 벗어나 사랑의 도피를 생각하지만 결국 자유 뒤에 따를 고통에 관한 책임감을 생각해 보며 또 한 번 유수프는 정신적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는 떠나려고 했다. 그보다 단순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그에게 요구하는 억압적인 것들을 피할 수 있는 어딘가로 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외로움의 단단한 덩어리가 그의 추방당한 가슴에 오래전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어디를 가든 그것이 함께 있으면서 그가 작은 성취를 위해 계획하는 걸 축소시키거나 흩어놓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p.308)
“문학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창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문학입니다.”라고 한 압둘라자크 구루나의 말처럼 이 소설로 나는 19~20세기 동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특별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