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회에 살고 있다. 바람직한 시민으로 모든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려면 자신이 믿지 않는 타 종교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할 때 내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도 더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고, 타 종교의 가르침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면서도 종교 간의 갈등이나 대립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그리 심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종교들이 서로를 인정할 때, 종교는 정의와 평화의 사회를 이루는 일에 순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많은 한국인이 믿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불교를 이해하는 일에 ‘페이융’의 책들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그의 책, <초조하지 않게 사는 법(금강경)>, <불안하지 않게 사는 법(육조단경)>, <법화경 마음공부>, <반야심경 마음공부>를 차례대로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미타경 마음공부>를 읽었다. 불교는 한 마디로 ‘마음공부’다. 지난번에 읽은 <반야심경 마음공부>에서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외우며 마음의 번뇌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페이융의 책들을 읽으면서 불교 가르침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결국 인생의 희로애락과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생각과 마음공부를 통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는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페이융은 ‘아미타경’을 소개하며 삶의 초조함을 극복하는 방법 두 가지를 알려 준다. 첫째는 이타적인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사리사욕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 헌신할 때 초조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둘째는 자아를 인식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이며 일생 동안 무엇을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 때 초조해지지 않는다.
이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주문을 생각해본다.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는 ‘귀의(歸依)한다, 돌이켜 의지한다’는 뜻이며, ‘아미타불’은 왕이었는데 왕위를 버리고 법장(法藏)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출가했다가 깨달음을 얻어 ‘서방 정토(淨土)’를 세운 부처다. 또한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의 모든 부처를 의미한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뜻으로, 불자는 마음을 다해 이 주문(呪文)을 외우면서 왕생(往生, 다른 세계에 태어남)을 구하는 것이다. 한편 ‘관세음보살’은 현실 세계에서 중생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듣고 구제하는 부처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은 부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현실의 번뇌에서 벗어나고 왕생을 소망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심오한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고 마음공부를 하려면 출가해야 한다. 그러면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삶의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왕생을 소망할 수 없는 것일까? 저자 페이융은 대장장이 이야기를 한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통인 대장장이에게 한 행각승(行脚僧)이 고통에서 벗어날 쉬운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것이었다. 대장장이가 괴로운 일을 하면서도 마음을 다해 ‘나무아미타불’을 외울 때 그는 번뇌에서 해방되었고 마지막 죽을 때도 극락세계로 갈 것을 확신했단다. 그렇다. 신의 은총을 입는 일은 많이 배우고 오래 수행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다해 간절히 신을 의지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불교의 구원관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신도들이 초조함과 불안에서 벗어나도록 단순한 명호(名號) 내지는 주문(呪文)을 외우도록 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라 생각한다. 종교는 겸허히 자신을 알아가고 겸손히 신을 의지하게 만든다. 이 책 뒤에 수록된 ‘우리말 아미타경 전문’을 천천히 읽어본다. 불교를 알아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