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수치심'으로 우리 시대 만연하는 혐오에 대해 누구보다 날카롭게 분석했던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새 책이 나왔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작금의 혐오 증가는 SNS의 발달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제한 없는 연결과 투명한 소통으로 연대의 폭과 깊이를 확장할 것이라 기대했던 SNS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SNS 회사 수익의 극대화를 위해 광고를 많이 오래 보도록 만드려고 너무 사용자 편의를 추구한한 탓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어떤 유저가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와 사상에 대해 검색을 시작하고 그것을 보기 위해 적당한 시간을 들이게 되면 SNS가 가동하는 검색 엔진의 발달한 AI가 오직 거기에 맞춰 정보들을 습득하게 만드는 것이다. 요즘 가짜 뉴스가 방대하게 생산되고 그 폐해가 높다는 지적이 많은데, 이렇게 가짜 뉴스가 늘어나는 이유도 SNS의 검색 엔진이 가진 알고리즘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판단, 이런 것을 고수하기 쉬운 상황이고 이런 경향이 깊어지다 보니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에 타자에 대한 이해 보다는 혐오를 더 많이 표출하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극우가 득세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영국의 브렉시트 또한 그 영향이 컸다. 이것을 두고 '분극화'라고 하는데 현재 날로 그 정도가 심해져 지금은 민주주의의 중대한 위기가 되고 있다. 그것이 가져올 세상이 지옥이라는 건 이미 우리가 거쳐 온 역사가 잘 증명하는 바다. 오직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체제인 파시즘이 양산한 2차 세계 대전의 비극만 들여다봐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제 그 혐오를 벗어나 연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때이다. 마사 누스바움이 연대에 대한 책을 쓴 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는 말이다.
혐오를 조장하는 분극화가 날로 심해지는 이유는 사회가 그만큼 불안하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가 신체의 취약성과 역겨움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느낄 때 자기보다 더 취약한 집단을 비난하며 성급하게 희생양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정도를 지금의 SNS 시스템이 더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걱정과 불안의 탓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연대의 첫 발자국이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마사 누스바움은 성급하지 않을 것을 제안한다. 어떤 것을 듣고 어떤 감정이 들 때, 왜 내가 그런 기분에 빠지는지 찬찬히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자기 검증을 제대로 하려면 무엇보다 내게 닥친 사건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 필요하다. 선동은 사건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도 않고 명확하게 분석하지 않는다. 이성 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선동이다. 가짜 뉴스가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혹세무민하는 선동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판단으로 그들이 하는 말이 과연 진실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성차별과 여성 혐오를 구분하는 것처럼. 마사 누스바움은 이 둘이 자주 혼동되는데 그건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성차별은 일종의 믿음 체계다. 여자에겐 엄마가 되는 게 어울려. 이렇게 말한다면 성차별이다. 그건 말하는 이의 믿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는 이와 다른 문제다. 왜냐하면 이건 자신이 가진 특권을 수호하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는 대부분 나의 특수한 이해 관계와 결부될 때 일어난다. 그러므로 여기엔 정당화할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런 식으로 어떤 것을 접할 때 엄밀하게 따지고 드는 습관이 필요하다. 내 앞으로 쏟아지는 많은 정보들 속에서 어떤 것이 독이며 어떤 것이 득인지 알려면 남의 눈에 의지해선 안된다. 연대는 그렇게 자기 주체성을 온전히 되찾을 때 비로소 싹을 틔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