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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도서]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이윤기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조르바여, 조르바여!

 이름을 불러본다. 장본인이야 듣자마자 '거,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 사람 괜히 부르지 말고 마음이 허하걸랑 많이 먹고 푹 잠이나 자소. 삶이라는 게 어차피 하나님이 던져준 개 뼈다귀 같은 것. 아까울 일도, 실망할 일도 별로 없는 법이니."하고 타박할 터이지만.
 그래도 불러본다. 그리운 이름이여, 한 톨의 지혜나마 구걸하고픈 마음의 부자여.

 나는 지금 회색빛, 낙담과 탄식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일까? 조르바가 바라보는 지중해 바다의 푸른 빛이 여름날 정오의 땡볕마냥 더욱 눈부시게 보인다. 내가 남의 욕망을 내 것으로 알며 허겁지겁 살고 있을 때, 조르바는 거대한 청새치가 되어 그 바다를 자유로이 누볐으리라. 발 닿는 곳마다 겸허의 곡괭이로 경험을 캐고 열린 마음의 거름으로다가 지혜의 열매를 길렀으니  소설 속의 '나'가 그러했듯이 내 어찌 반하지 않으리.

 그의 말대로 영원히 귀머거리의 집 대문만 두드렸던 나. 두드려야 할 곳을 두드리지 못했으면서도 열어주지 않는 문만 타박하고 원망하고 살았으니. 새삼 그간 흘려보낸 시간들이 아까워진다. 후회와 번민의 손가락이 문장을 더듬다가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난 거지요. 그 날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을 몽땅 까먹어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 된 거예요. 기껏해야 어기적거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요.'란 문장에서는 허방에 발이 빠진듯 멈춰서서 한동안 멍하니 서성거렸다.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비둘기를 닮으려한 까마귀였다. 나의 참된 모습을 잊고 남과 같은 모습이 되려고 애썼던 까마귀. 그러다 결국 내 진짜 모습조차 모르게 된 까마귀. 내가 나를 잃어버렸기에 갈짓자로 걸었던 것을, 그것도 모르고 마냥 내 모자람, 무력함만 탓하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르바는 어느 틈에 거울 하나로 내 앞에 세워놓았고 거기서 난 남의 말과 생각으로 온통 덧칠된 자화상을 마주해야 했다.

 그랬으니 지금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당연하리라. 어느덧 삶의 삭풍에 지쳤고 희망의 노래는 잃어버렸다. 문득 고개들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 알 수 없고 놓인 길 또한 저만치 앞에 어둠이 내려 앉아 가야할 곳이 맞는 지 가늠하기 어렵다. 책만 보다 활자의 늪에 빠져버려 살아 날뛰는 세상의 진리를 놓친 작품 속의 '나'와도 같이 내 말과 생각이 아니라 너무 많이 주입된 남의 말과 생각으로 살아온 탓이다. 그러니 작품 속의 '나'가 한 이런 깨달음은 나의 것이기도 하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언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p. 198)  

 맞다. 나를 비워야 했다. 남의 말과 생각으로 주조된 나. 언어로 빚어낸 내가 아니라 내 몸으로 한 경험으로 길어낸 내가 되어야 했다. 나는 지금까지 남이 마련한 휠체어에 앉아 삶의 길을 걸어온 것이었다. 이제 일어나 내 발로 걸어야 했다. 조르바처럼. 문득 자유가 거기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상식의 영토에는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 주니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있다. 목표가 그렇고 미래가 그렇고 계획이 그러하며 종교가 그렇다. 그런데 조르바와 거닐다 돌아와 문득 다시금 바라보니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고 여겼던 것들이 오히려 우리 삶을 가두는 벽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목표는 과정의 가치를 앗아가고 미래는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게 하며 계획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치기 하는데다 종교는 계율과 금욕으로 나의 부족을 되새기게 하며 껴안아야 할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킨다. 결국 사랑은 없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나로 만든다. 그러고 보니 영화 '쇼생크 탈출'이 생각난다. 거기서 오래도록 수인 생활을 한 모건 프리먼은 바깥 세상에 나와서도 수인인 것처럼 산다. 너무 많이 주어진 자유가 버거워 목숨을 끊을까 하는 충동마저 가진다.

그렇게 될까봐 두렵다. 남이 만들어준 감옥 안에서 한 평도 안되는 공간을 내 세상의 전부라 여기고 살까봐 무섭다. 그러다 나 역시 죄없는 과부를 칼로 찔렀던 마놀라카스와 그를 방관했던 크레타의 마을 사람들이나 오르탕스 부인이 죽어갈 때 그녀가 가진 물건들을 가져가려고 빨리 죽어라고 곡을 하던 마을 할머니들과 죽자마자 죽은 이에 대한 애도는 조금도 없이 더 많이 가지겠다고 다투며 무뢰한 짓도 서슴없이 벌였던 온갖 사람들처럼 될 것 같기에 소름이 돋는다. 그 때 유일하게 과부를 위해 싸워준 사람이 누구였던가? 오르탕스 부인을 위해 진정한 눈물을 흘렸던 자는 또 누구였던가? 바로 조르바였다. 여인에 대해 형편없는 언사를 자주 했던 그였지만 사실 그들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조르바였다. 그 사랑도 육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 비천한 대지에 떨어져 유한한 생을 살아야 하는 슬픈 운명을 다같이 지닌 인간임을 연민한 보편적 사랑이었다. 그렇게 그가 그 어떤 시선에도 얽매이지 않고 사람 자체만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기에 더 커다란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가야 한다. 어차피 한 번 사는 것. 나 또한 큰 사랑으로 사람과 세상을 품고 싶기에. 하여 비워야 한다. 주입된 생각으로 가득찬 나를 끝까지 게워내야 한다. 조르바처럼 과정 자체를 즐기고, 오늘을 누리며, 삶의 다양한 경로를 아우르면서, 내세의 안락보다 이생의 행복을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나는 지금가지 누군가 갖다 준 산소 마스크로 호흡하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그들의 필터로 걸러낸 공기로 양육되고 있었다. 이제 그 마스크를 벗어던질 때다. 내 코와 폐로 진짜 세상의 대기를 호흡할 때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엔 언제까지나 열혈 청춘일 내 스승 조르바가 '이 친구야!'하면서 어깨를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조르바여, 조르바여! 쉼없이 일렁이는 자유의 바람이여, 모두를 꿀처럼 달콤하게 적실 사랑의 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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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ne518


    사람은 정말 자기 생각이 있을까 싶게 만드는군요 처음에는 그렇게 배울 수밖에 없겠죠 그러다가 어쩐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고, 다른 건 없을까 하지 않을지... 좋은 것이라고 해도 그게 정말 좋은 것인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한테는 맞고 누구한테는 맞지 않겠죠 좀 이상한 말이네요 자유로우면 좋을 텐데...


    희선

    2015.12.27 00:50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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