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나를 설득해 믿도록 한,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 잊지 않으려고 기록하고 새기는데, 실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래, 결심했어! 했더라도 잊어 버린 나와의 약속들이 숱하게 많다. 그나마 잊고 새기기를 반복한 것들은 가끔이라도 머리를 흔들며 제 정신을 차릴 때 살짝 수면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일상의 분주함을 잠시 멈췄을 때만 떠올리게 되는. 가장 자주 떠올리는 가치는 '사랑', 그 다음이 '배움과 성장'이다. 그냥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사랑하고 배우고 성장해야 하는 사람이 된다.
나이를 먹어가며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된 것이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에 힘을 실어준다. 요즘은 '별이 되기 전에'를 자주 떠올린다. '죽기 전에'란 말이다.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떠올리라는 의미다. 살아 있는 동안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금방 떠올리게 된다. 정신 없이 살다가도 이런 생각과 연결되는 태도와 행동을 선택하게 해준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자주 바꿀 수 있어, 무의식에 의지해 반복하는 일상의 틀을 깨고 나올 수 있다. 다른 행동이나 말로 일상과 사람을 대하게 된다.
책이 내게 심어준 믿음 중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있다. 조금 유별나 누구에게도 진지하게 얘기하기 힘든 이야기. 지금 내가 겪는 모든 시련은 태어나기 전 내가 계획한 것이고, 이런 시련을 겪기로 계획한 이유는, 영혼이 이 생의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라는, 누가 들어도 황당할 것 같은 이야기다. 사후 세계와 연결되는 이야기라 증명할 길은 없지만 이런 생각을 자주 반복해 내 안에 심어놓으려 악착같이 애를 쓰고 있다. 지금 삶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방법 중 이만한 게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나는 죽으려고 했는데 그것은 삶이 보잘 것 없어서였다. 삶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빠와 신을 사랑하는 엄마와 사랑이 무언지 모르는 나와 궁핍한 생활이 싫어서 나는 오랫동안 살아가는 일을 언제든 그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89쪽)
여기 이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죽지 않고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믿음이 내 안에 뿌리내려 있다. 책이 강제로 심어준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준 책을 만난 게 절대 우연이라 생각지 않는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믿음도 내 안에 있기 때문. 삶은 우리가 잠시 거쳐가는 여정이지만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 우리 영혼이 태어나기 전에 미리 선택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아무리 가혹한 시련이라도 좀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나는 심신이 힘들어 질 때마다 그렇게 의미부여를 한다.
한정원의 <시와 산책>을 읽은지 한참 됐다. 작가의 생각과 문장이 좋아 다시 읽다가, 이어진 책 <산책과 연애>를 찾아보게 됐다. 마침 유진목 시인 책이라 호기심에 구입. 작가를 알게 된 건, 이슬아의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에서 시집 <식물원>을 소개했기 때문. <식물원>도 미루다 이번에 <연애의 책>과 같이 구입했다. 낭만적인 연애,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없고, 씁쓸한 뒷맛을 남겼던 연애 경험,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 특유의 생각을 담은 <산책과 연애> 덕분에 현실에 발을 딛고 작가의 책들을 읽을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내가 했던 모든 연애는 나를 혼자서 걷게 했다. 걷는 것말고 다른 좋은 방법을 알지 못했다. 걷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효과가 없었다. 걸음을 멈추는 순간 나는 그를 죽이러 가고 말 것을 알았다. 그래서 무조건 걸었다.(70쪽)
누군가는 생각하기 위해 걷고, 누군가는 잊기 위해 걷는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 지인에게 의사가 그랬단다. 천천히 걸으면 잡념에 괴롭힘을 당하니 힘든 산행 같은 걸 해보라고. 평소 생각 없이 살았다면 생각하기 위해 걸어야 하고, 너무 많은 생각에 힘들다면 생각을 멈추기 위해 걸어야 한다. 연애와 사랑 모두 감정에 너무 치우치면 안 될 일. 타인을 대할 때는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그러니 산책은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좋은 습관이 될 수 있다. 철학자까지는 아니라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끼리 연애할 때 종종 자신이 하는 연애에 도취되는 사람이 있다. 방금 쓴 이 문장은 복수의 문장이다. 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연애를 통해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과 감정을 음미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달콤하게 여기는 듯하다. 자신이 쾌감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매번 놀란다. (53쪽)
존중받지 못하고 상처받은 이야기를 읽을 때, 에고 에고(ego ego)하고 책 여백에 끼적였다. 요즘 나에게 또 다른 믿음을 심어주고 있는 책이 <에고라는 적>이라 그렇다. 덕분에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마음을 감지하고 내려놓으려는 노력을 일상에 더하게 됐다. 나로 살면서 내 입장을 내려놓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게 안 되는 사람은 타인에게 쉽게 상처주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런 나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온다.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우리는 거울 삼아 자신을 먼저 돌아볼 일이다.
자기 자신과 가까운 인간은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에 유해하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는 인간이 타인과의 거리 두기에 가까스로 성공한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가장 가까운 거리라는 것. 그것이 내가 살면서 맺어온 관계들에서 다만 인간으로 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배운 것이다. (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