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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미술관

[도서] 불편한 미술관

김태권 저/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남성에게 여성은 성녀 아니면 탕녀" 라는 말은 유명하다. 여성을 인격체가 아니라 판타지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같은 남성끼리는 좀처럼 그렇게 바라보지 않을 것인데 말이다. 왜 남성은 여성을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을까? 현실의 여성이 상상 속 여성과 다르다면, 현실과 다른 상상을 고치는 것이 정답일 터. 하지만 현실의 여성을 판타지 속 여성에 맞춰 뜯어고치려는 남성이 뜻밖에도 적지 않다. (p.19)

 

 

 

 

난 스스로를 인권감수성이 어느 정도는 높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예술작품과 그 작가의 상관관계에 따른 의문에는 잠시 주춤하였다.

예술이 인종차별 및 성차별, 장애인차별 등의 요소를 품고 있을 때, 그것은 오로지 예술일 뿐이므로 면책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 나는 동시대인의 예술(?)은 차별적 요소를 담아서는 안 되고, 만일 잘못을 저질렀다면 책임을 지는 동시에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대인이 아니면 그렇게까지 할 수 없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문학작품이자 영화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부분에서 뜨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작품을 좋아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흑인들이 처음으로 자유롭게 되었을 때, 분명히 스스로 앞서나가 자유를 만끽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바람~>에서처럼 "주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있을 법한 일이긴 하니 작품 자체가 인종차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런데 나는 여성차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싫어한다.

책이 쓰인 시대를 생각하면 나올 법한 이야기이고, 여전히 성차별이 남아있는 지금을 생각하면 추천도서로 선택받는 것 역시 있을 법하며 차별적 부분을 제외하면 괜찮은 작품임을 아는데도.

내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옹호하고 싶은 일과, 내가 당사자이기 때문에 아프게 와닿는 일들은 다른 일 같으면서도 사실은 똑같은 일이다.

 

동시대인이 아니기에 그 작가들과 작품들의 인종차별 및 성차별적 요소는 이제 고쳐질 수는 없겠지만, 그것들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짠해지는 대상자들은 복잡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차별이 넘쳐나는 예술작품들을 모조리 태워버릴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다.

또한 그것들은 차별의 시대를 기억하는 메모리얼 매개체와 같은 역할도 할 것이다.

 

 

 

여론의 뭇매를 맞을 끔찍한 사건의 용의자라 하더라도 불구속 상태로 수사받을 수 있어야 하며, 정해진 형량만 채우면 감옥에서 내보내야 하고, 전자발찌를 채우더라도 어느 정도는 돌아다니게 해줘야 한다. 어떤 분들에게는 거북할지 모른다. 재범의 가능성이 높은 강력범이라도 우리 주위를 돌아다닐 수 있어야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라는 사실, 받아들이지 못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결정권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그것이 원칙이다. 우리 마음이 아무리 불편해도 말이다.(p.140)

 

 

 

 

 

나는 여전히 <바람~>을 좋아하겠지만 앞으로는 그 안에 담긴 인종차별적 요소를 좀 더 날카롭게 인지하고 흑인들이 그 작품에 대해 갖는 감정 역시 이해하며, 나의 아픔만 아픔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명확히 새겨본다.

 

이 책은 주로 미술 관련 예술작품에 담겨 있는 인종차별적 시선과 성차별적 시선, 계급차별적 시선, 장애인차별적 시선 등을 폭넓게 아우른다.

나 역시 한국인 여성으로서 해외에서의 인종차별이나 국내외에서의 성차별, 소시민으로서 계급차별 등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책이 짚어주는, 역사가 오래된 차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안타까우면서도 사이다를 마시듯 시원했고 재미있었다.

 

저자가 쓰고 있듯이 우리는 세상을 살며 마주하는 상황들에 불편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겪는 불평등과 차별과 불합리한 일들에 함께 화내고 개선방법을 찾아야 한다.

진실을 보게 하는 "빨간 약"은 저절로 먹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먹을 용기를 내고 받아들여야 보이는 것이 있는 법이다.

부디 오로지 나의 안녕과 편함만을 위해 다른 이들의 고통에 눈 감은 채 "파란 약"을 택하는 짓은 하지 말길.

 

 

누스바움 부부는 훗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수용소 밖에 있었다.

누스바움은 왜 노란 별을 단 모습으로 스스로를 그렸는가? 부모 형제가 게토와 수용소에 갇힌 세상에서, 자기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낀 것 같다. 혁명전사가 아니어도, 신에 맞선 영웅이 아니어도, 인간은 부당하게 갇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 가두는 세상에 산다면, 비록 지금 당장 갇혀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 역시 자유인은 아닌 것이다. (p.144)

 

 


그리고 오늘날 구호단체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내전과 기아에 시달리는 제3세계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모금을 하는 단체들이 있다. 선전 효과를 높이기 위해 어떤 단체는 어린아이의 고통받는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우리는 눈을 떼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그 알량한 눈길이 아이를 대상화하는 것은 아닐까? 이를 가리키는 말이 '빈곤의 포르노'다. 빈곤퇴치라는 목적이 아무리 옳아도 선전방법이 고통을 진열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타인의 고통이 선정적으로 전시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 '빈곤의 포르노' 없이 후원금이 모일 정도로 우리 사회는 성숙한가?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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