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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

[도서]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

강용자 저/김정희 편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잠시 인간의 수명이 너무 짧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선대가 잘못을 반성하고 되새길 여유도 없이, 그 고통을 제대로 겪어 보지도 못한 후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어 과오를 자꾸만 반복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선대가 한 200~300년을 산다 치고 나머지 100년이 여생으로 남았을 때쯤 후대들이 탄생한다면 끊없는 실수의 고리들이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1, 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세계는 다시 민족주의, 더 나아가 국수주의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는 그 영향으로 전쟁의 화염이 치솟고 있으며, 테러도 무시 못할 수준으로 벌어진다. 언제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또한 지금은 자본경제라는 그늘에 숨어 이뤄지는 타국 경제 점령이 20세기 초반처럼 대놓고 토지 점령으로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역사책 속에서 만나는 인물들이 겪은 아픔을 내가 겪는다고 생각해 보면 난 도저히 자신이 없다. 그들이 그 어두운 터널을 어떻게 헤치고 나왔을지, 만신창이가 되어 터널 밖으로 나왔을 그들이 안쓰럽고 존경스럽다.


조선 왕조는 그야말로 무능의 극치를 달렸다. (안 그래도 무능한 자들을 성리학이 더욱 망쳐놓았다) 서양이 모든 사회 시스템을 국민 위주로 개편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우리나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이념에만 매달려 스스로 동네북을 자처했다. 그래서 난 조선 왕조를 경멸하는데, 이 나라의 역사에 한(恨)을 새기게 만든 주범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원치 않게 왕가의 핏줄을 타고나 자유롭게 살지 못한 이들에는 끝없는 연민을 갖게 된다. 사회의 앞뒤 꽉 막힌 체제를 한 개인이 부수고 홀로 서기엔 제약이 너무나 많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토록 강인하고 선구적이지는 않기에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들의 고통이 들여다보이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목이 메이고 눈물이 맺혀 휴지가 필요했다.



은 전하와 나는 피차 불행한 조국의 왕족이었기에 서로 눈물겨운 역정을 나누는 부부가 되었다. 거목이 휘어질 때 그 기우는 아픔이 크듯 망해 가는 나라의 왕세자였기에 당하는 전하의 아픔은 옆에서도 감히 추측하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인간으로서 은 전하는 훌륭한 분이었다. 따뜻하고 깊은 마음과 중후한 인품, 뛰어난 영어·프랑스어 실력과 조선 유학생들을 위한 나름대로의 장학회 사업 등 망국한을 되씹으며 몸부림치는 그분을 보며 나는 한·일 융화보다 외로운 그분의 따뜻한 벗이 되고자 했었다. 부부로서 우리 두 사람은 오히려 행복했다. 험하고 암담한 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결합과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p. 6)



이 책은 영친왕으로 불리는 영왕 이은의 아내였던 일본인 나시모토미야 마사코(혼인 뒤엔 이 마사코 또는 이방자)의 자서전적 전기로서, 경향신문의 강용자 기자가 이 마사코의 구술을 받아 적어 엮은 이야기로 소설이 아니라 극히 사실적인 기록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일생은 어느 것 하나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 인질이 되어 망해가는 나라의 모습을 멀리서 봐야 했던 영왕의 아픔, 일본의 핏줄이 흐르고 있기에 남편과 다른 조선인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그를 위로해 주려 애쓰던 이 마사코. 조선 왕가의 혈통이 될 것을 우려한 일본의 계략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아기 왕자 이 진. 부부가 10년만에 다시 얻은 천금 같은 아들이자 조선 왕가의 마지막 혈통이었으나 대한민국으로부터 외면당한 왕자 이 구. 사춘기 감성이 한창 여릴대로 여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와 영왕과 마찬가지로 인질이 되어 향수병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등으로 정신병을 앓게 된 덕혜 옹주. 영왕의 정혼자였으나 일본이 영왕과 이 마사코를 강제 혼인시킴으로써 평생 결혼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일본에 의해 잃게 되는 등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규수 민갑완 등등.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일이 왜 일어나야 했는지 슬프고 또 두려웠다. 역사는 반복된다고들 하니까 말이다. 역사란 것이 문명의 기록이 아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기록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불령선인'으로 몰아 '불령단 수색대'라는 것을 만들고, 자신들을 지킨다는 자경단을 만들어 거리를 휩쓸며 조선인을 사냥하러 다녔다. 이들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하도 조선인이므로 우리들에게도 위험이 닥칠 염려가 있었다. 우리는 살던 집을 버리고 황실 궁내성 제2대기실 앞에 쳐진 텐트 속에서 1주일 동안을 피신해 있어야 했다. (중략) 전하는 슬픔과 분노로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1주일 내내 전하는 눈물을 글썽이며 괴로워했다. 참으로 지옥과도 같은 한 주일이었다. 나는 전하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도 일본인이었으므로 이 모든 일이 내 잘못인 듯 죄책감으로 몸이 죄어드는 듯했다. 전하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전하와 나는 나라나 피를 초월한 애정과 이해로 굳게 맺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깊은 도랑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p. 128)



강제로 하게 된 정략결혼이었으나 그 어떤 일본 여자도 이 마사코처럼 영왕을 위하고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인질로 끌려가 족쇄에 매인 생활이었으나 영왕이 그나마 누릴 수 있었던 최대의 행운은 바로 이 마사코와의 결혼이 아니었을까? 이 마사코는 남편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그를 편안하고 안락하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조선이 당하는 수탈을 보며 괴로워하는 영왕과 함께 울고, 분노하며 그를 위로했고, 조선 왕가의 혈통을 잇고자 아들을 낳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했다. 해방후 일본의 경제적 지원이 끊긴 뒤 한국에서 냉대를 받고 영왕이 의기소침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아 빈궁해졌을 때도 그를 자신이 지켜주겠다고 다짐한다. 두 사람간의 사랑이 그 단단한 연결고리가 되었겠지만 이 여인의 강직한 천성이 끊임없이 인내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으리라. 고국의 일을 슬퍼하고 괴로워한 영왕보다도 그의 곁에서 그를 보살피며 조선의 왕가에도 최선을 다한 이 마사코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영왕이시여, 전하께서 구라파를 순유하시와 각국 원수들과 친교를 맺으심은 경하할 일이오나 한국 왕실이나 한국의 실재를 표시하지 않으신 것은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전하가 만일 고종 황제께서 한일보호조약을 무효로 만들자고 밀사를 일부러 헤이그에 보내셨던 사실을 잊지 않으셨다면 신문 기자들에게 '나는 일본 황족이 아니고 한국의 황태자'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하소서. 우리들 구라파에 있는 한국인들은 그러한 일이 있기를 기대하고 전하를 일제로부터 탈환하여 상하이나 노령으로 모시고 갈 계획도 세웠으나 첫째 전하의 마음이 약하시어 일본 군인들을 선두로 구라파 여행을 즐기고 계시니 어찌 한심하지 않사오리까? 전하께서 모름지기 대의명분을 밝히시어 고종 황제의 높으신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소서......" (p. 202)



일제의 허락을 받아 부부는 답답한 일본을 벗어나 1년간 해외로 떠난다. 그들이 헤이그에 머물게 되었을 때 약재상이라는 이가 영왕에게 주고 싶다며 명심단이라는 약을 가져온다. 그 약 상자 속에는 위의 내용이 적힌 건백서가 들어있었으나 부부를 따라다니던 일본인 차관이 숨겨 버리고 약만을 전해 준다. 이 마사코는 당시에 그들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며 영왕을 감싸지만, 나 역시 영왕의 처사가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지, 독립을 위해 전면에 나서지 않는지. 하지만 그가 일부러 숨 죽인 채 지낸 것은 왕가의 다른 인물들이 독살 당하거나 살해 당하는 것을 보고 본인은 멀쩡히 살아남아 훗날 조선이 자유로워졌을 때 왕가를 재건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왕실의 상징성을 생각해 볼 때, 왕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조선의 백성들이 광복의 날을 꿈꿀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볼모로 와서 저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산 사람이오. 많은 조선인들이 나를 왜 망명도 하지 않고 일본의 보호 밑에 있느냐고 비난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소. 그러나 내가 망명하면 조선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소? 너의 왕도 도망갔으니 너희들은 잘 대우해 줄 필요가 없다고 조선인들을 개돼지같이 부리고 왕실도 없애 버릴 것이오. 일본 국수주의자들은 그렇잖아도 그렇게 떠들고 있소. 내가 베이징에 가면 그곳의 조선 군인들을 조금이라도 더 보호해 줄 수가 있소. 명색이 왕이라는 내가 왜 백성들보다 나라 생각을 못 하겠소?" (p. 236)


1940년은 일본 기원 2600년이 되는 해였다. 이해 11월 10일에 기념식이 거행되는 것을 기회로 그동안 전하가 '조선'을 전부 '한국'으로 고치도록 건의하고 노력한 것이 이뤄졌다. 조선은 이미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는데도 일본에서는 계속 조선으로 불리고 있었다. 또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을 조센징으로 얕보는 말투를 써서 전하는 늘 이것을 싫어했다. 또 이것을 계기로 도쿄의 이왕직 장관 관사를 한국 여자 유학생들의 기숙사로 개방했다. (중략) 전하는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일본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조국의 장래는 젊은이들에게 달려 있어. 젊은이들을 잘 교육시켜야 돼."하고 늘 말했다.우리는 한국인 유학생 중에 머리는 좋으나 집안이 가난한 사람을 몇 명씩 뽑아 한 달에 몇 십 원씩의 장학금을 주었다. (p. 240)


전하는 중·일 전쟁이 일어난 이후부터 한국의 문화재에 대해서 바짝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 시국이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한국의 고유한 문화재 보존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우 공 등 믿을 만한 사람이 한국에 갈 때는 명창들의 민요나 창극이 담긴 레코드판, 나전칠기, 갓 등의 문화재나 민속품을 구해 오라고 부탁해서 이동백·김창룡 등 명창들의 레코드판을 구해왔다. 1938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는 "전하가 어떻게 비천한 상가에 납시느냐"는 친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흥식 씨가 운영하는 화신 백화점에 가서 고려 소기구·고려 소주기·청동 문진 등 고유한 문화재들을 샀다. (p. 245)



하지만 책을 읽으며 영왕을 미워할 수 없었던 것은 일생에 걸쳐 얼마나 괴로워하고 고통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위에 인용한 것처럼 조용히 나라의 일을 도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망국의 왕이었으나 인간이었고, 고통과 죄책감, 두려움도 느꼈을 것이다. 황태자 또는 왕이라는 직위에서 본다면 무능한 조선 왕가의 또 다른 무능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특히 그의 활동이 우리나라의 자립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가 일본군 장성으로서 전쟁에서 일본에 이로운 결과를 가져다 준 것도 좋은 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는 무력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조심스레나마 도움의 손길을 뻗으려 애썼고 조국의 고통에 울분을 토했던 인질이었다. 만일 친일파였다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 했을지라도 빈정거리게 됐으리라. 한 인간으로 그가 겪은 것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대통령은 전주 이 씨로 왕실의 종친이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쳐 온 애국자인 만큼 그가 대통령이 되어 민주정치를 베풀면 조국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믿은 전하는 주일 대표부를 통해 여러 번 귀국 희망을 전했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한국의 국유재산이므로 주일 대표부 건물로 쓰도록 내어 놓으라는 훈령을 보내 왔다. 이 집의 집세로 겨우 연명하는데 그것을 내놓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이 집은 지난날 메이지 천황이 준 도리이자카의 집을 일본 궁내성에 반환하고 대신 궁내성에서 새로 지어 증정한 것이므로 한국의 재산이 아닐뿐더러 영왕 개인의 소유인 것이다. (p. 275)


신 대사는 나중에 "이 대통령의 심리는 도무지 모르겠다. 자기도 걸핏하면 전주 이 씨 무슨 대군의 몇 대 손이라고 하면서 종손인 이왕에게는 왜 그리 냉정한지. 아마 이왕이 귀국하면 많은 사람들이 동정하고 인기가 있어서 자기에게 불리할 것 같아서였나 보다"고 말했다. (중략) 6·25가 나자 도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전하를 한국의 국방 관계에 참여시킬 생각을 은근히 했던 모양이다. 당시 한국사람 중에는 전략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고 전하와 홍사익 중장 두 사람만이 일본 육군대학에서 군사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용병작전의 경험이 있는데, 홍 중장은 불행히도 필리핀에서 태평양전쟁의 전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남은 사람은 전하 혼자였다. 더욱이 전하는 보·불전쟁사의 권위자이므로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중에 이런 말이 오가고 한국에서는 전하가 국방장관에 취임하려고 귀국한다는 소문까지 났다 한다. 또 유림들은 부산 피난 수도에서 '이은 선생 환국 환영회'까지 만들고 전하를 모셔오자는 운동을 벌여 전하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전하에 대한 이런 호의는 이 대통령을 더욱 자극했고 전하를 미워해서, 주변 사람들이 전하 이름도 못 꺼내게 했다 한다. (p. 277)



이승만은 광복 전 조선을 위해 독립활동을 벌였으나,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의 일들로 인해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책에 기록된 내용을 보아도 그는 스스로가 왕가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 했으면서도 영왕 내외의 귀국을 막고 그들의 해외 이동시 필요한 여권 발급조차 거부하는 등 치졸한 행동을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도 대통령직에 연연하며 매달렸던 것을 보면 자신의 지위에 상당히 집착하는 인물인 듯한데, 아마도 영왕의 귀국으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영왕 부부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야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때 영왕은 건강이 쇠하여 한국에 돌아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땅에 돌아왔으나 자신의 발을 내딛어 밟아보지도 못한 채 침대에만 누워 생활하다 끝내 눈을 감는다. 이 마사코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한국에 머물며 정신지체아들을 위한 여러 기관을 설립하고 불우한 이웃들을 돌보는 사업 등을 벌여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받아들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존경받을 만한 여인이었다.



오재경 씨는 구황실 사무총국장에 임명되자 즉시 구황실 재산 상태를 면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관련서류가 하나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한다. 재산세 대장이나 등기도 없는 것을 천신만고 끝에 밤을 새워 간신히 재산목록을 만들었으나, 1960년 6월 6일 밤 원인 모를 불이 나 구황실 사무총국이 전소되는 바람에 애써 정리한 서류가 몽땅 타 버렸다. 이 정리를 맡은 이 창석 사무차장은 공보부 공보국장, 문교부 국장 등을 역임하며 성실, 정직해서 오재경 씨의 신임이 두터웠고 이번에도 오 씨가 구황실 사무국으로 데려온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구황실의 동산은 말할 것도 없고 임야나 토지 등 막대한 부동산이 당시 권력가들의 손에 다 들어갔으며 서울 교외의 수십만 평은 물론 왕릉의 땅까지 팔아먹은 데는 기가 막혀 말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부정이 많은 것을 조사하려 하니 누군가가 불을 질러 증거를 다 없애 버렸다는 것이었다. (p. 305)



2015년 오늘날까지도 당시 친일파 청산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로명 주소 체계가 시행되고 있는 지금,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깃든 도로명은 사라지고 친일 행적 논란이 있는 이들의 호나 이름이 붙은 도로명은 여전히 남아 있다. 친일재산 환수가 이뤄지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이미 막대한 재산으로 불려낸 이익금만으로도 친일파의 후손들이 '행복하게' 지낼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런 뒤가 구린 이들이 광복 70년이 지난 현재, 사회 지도층에는 참 많다. 그 후손으로 태어난 것이 죄는 아니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의 조상들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을 했음을 반드시 명심하고 속죄하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은 전하가 일본에 오기 전 어느 날, 함녕전에 들렀더니 마침 붓글씨를 쓰고 있던 황제께서 "아가야, 너 이런 글귀를 아느냐" 하면서 글귀 하나를 써보여 주었다.


先天下之憂而憂 (선천하지우이우)

後天下之樂而樂 (후천하지락이락)

즉 '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낙은 나중에 즐긴다'는 뜻인데 제왕이 되는 사람은 백성의 걱정을 백성보다 먼저하고 백성의 즐거움은 백성보다 나중에 즐겨야 한다는 교훈이다. (p. 50)



고종 황제의 너무 늦어 버린 깨달음이었다. 조선 왕실처럼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이 나라의 위정자들에게도 필요한 조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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