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이 님이 요 책을 보내주시면서 재밌게 읽어 달라고 하셨으나, 재미는 없었다;;; 죽음에 대한 주제에 재미가 웬 말이냐!! 라고 할는지도 모르지만, 다음 페이지가 궁금한 호기심 정도는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내가 생각한 것과 조금 괴리가 있었다. 다행히 책이 그리 두껍지 않아서 다 읽어냈고, 책을 읽던 도중 문득, 이 질병들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와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살짝 눈물이 돌면서 지루하던 게 다소 수그러들었다. 역시 많은 일들이 내 일이 될 때와 아닐 때의 감상은 극명하게 달라지는 것 같다.
다행히 가까운 가족 중에는 아픈 사람이 없다. 10년 전쯤 외할머니께서 (아마도) 암으로 돌아가시고, 또 그 몇 년 전에 친할머니께서 역시 (아마도) 암으로 돌아가신 이후로는 아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하지만 지금껏 평온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부모님의 연세가 한 분은 예순을 넘으시고 한 분은 곧 넘으실 것이기에 건강은 최대의 화두이다. 신랑님의 아버지, 그러니까 시아버님은 신랑이 군대에 가 있을 때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많은 병들이 그렇지만 당뇨병도 가족성이 깊으므로 나는 신랑님의 걱정을 꽤나 염려하는 편이다. 우리 아빠한테 물려받은 건강염려증이 조금 섞이기도 했을 테지만;;
이 책은 말기 환자와 그 가족들, 환자를 돌보는 의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말기란 모든 질병에 있어서 더 이상의 치료가 병의 증세를 호전시키거나 유지시킬 수 없을 때를 가리키며 대개는 기대수명이 6개월 이하로 남았을 경우를 말한다. 암은 1기에서 4기까지 진행되는데, 4기가 가장 심각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말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4기에서도 충분히 좋은 경과를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종종 볼 수 있는 '말기 암환자가 기적적으로 치유되다'는 등의 문구는 4기를 말기로 오해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에게 병의 심각성을 알릴 것인지 알리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혼란스러워 하는 에피소드가 종종 방송된다. 환자가 병이 나을 수 없음을 알게 되면 자포자기하게 될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소개한 2008~2009년 조사에 따르면 암환자의 91.8% 이상이 말기임을 알기를 원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진실이라고 해도 그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말기 환자들이 시한부를 선고받을 때는 침울해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분노한다. 하지만 곧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차분히 마지막을 준비해 간다. 이는 갑작스런 죽음보다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함으로써 주변인들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자신의 부재로 일어날 혼돈을 방지할 수 있으며, 환자 또한 보다 편안하고 정돈된 마음가짐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그것을 원할 것 같다. 어느 순간 갑자기 누군가에게 작별 인사를 할 틈도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내게 일어날 일을 미리 받아들인 후 사랑했던 사람들과 충분히 시간을 가진 후 인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가능하다면 환자에게 빨리 알릴 필요가 있다. 삶을 다시 펼쳐보며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조명하고 마지막까지 의미 있는 삶을 완성하는 시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너무 늦게 알려서 그들의 인생을 완성할 시간을 빼앗는다면 엄중한 도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상을 희망하되 최악을 대비하라"는 격언이 있다. 죽음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대비하면서도 치료에 대해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환자들이 때로는 연명의료를 통해 얼마간의 시간을 연장하는 것보다는 그 시간을 즐기며 보낼 수 있는 선택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의 가치가 그 생명이 얼마나 오래 살아가는지에 대한 양적인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삶의 양보다 삶의 질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말기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첫걸음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죽기 전에 가족들이 이런 말들은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고마웠다." "함께 있어서 행복했다. 사랑한다." (p. 71)
안락사니, 존엄사니, 요새는 죽음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용어들이 많다. 얼핏 보기엔 다 비슷한 말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 우선 안락사는 질병에 의한 죽음을 포함한 모든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인위적인 행위에 의한 죽음이다. 여기서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된다. 적극적 안락사는 고통을 받는 환자의 요청에 의해 약제 등을 투입해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이고, 소극적 안락사는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 공급이나 약물 투여 등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존엄사는 최선의 의학적인 치료를 다했음에도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여 질병에 의한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말기 암환자들의 고통은 정말 엄청나다고 한다. 고통이 너무나 심하다 보니 의사에게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게 아니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주문하는 일이 많다. 이 고통은 환자들의 삶의 질을 극심히 떨어뜨리게 되기 때문에 여기서 안락사나 존엄사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 환자들의 '품위 있게 죽을 권리'에 대한 논의는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말기 환자들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모르핀과 같은 마약성 진통제의 처방 횟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세계적으로 가장 적다. 결국 마음대로 안락사니 존엄사를 선택할 수도 없고, 의사들의 마약성 진통제 처방 횟수도 적어서 환자들은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다가 죽게 된다. 그러므로 저자는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계속할 것이 아니라 환자가 말기에 들어섰음을 알게 되면 이후로는 통증관리와 완화의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늘지 않는 환자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쓸데없이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마지막 날들을 환자가 아픔에 몸부림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소중히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to do list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to do 1.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한번 믿어보기
to do 2. 손녀들 머슴노릇 실컷해주기
to do 3. 평생 찍어주지 않았던 야당에 투표하기
to do 4. 꼼꼼하게 장례식 초청자 명단 작성
to do 5. 소홀했던 가족과 행복한 여행
to do 6. 빈틈이 없는지 장례식장 사전 답사하기
to do 7. 손녀들과 한번 더 힘껏 놀기
to do 8. 나를 닮아 꼼꼼한 아들에게 인수인계
to do 9. 이왕 믿은 신에게 세례 받기
to do 10. 쑥스럽지만 아내에게 사랑한다 말하자 (p. 140)
일본의 스나다 마미라는 영화 감독이 자신의 아버지가 말기 암을 진단받은 이후 적은 '엔딩노트'를 실천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었다고 한다. 위의 리스트가 바로 그것인데, 온갖 관들과 기기들을 몸에 주렁주렁 달고 병원 침대에 누워 지내는 것보다 생의 마지막 날들을 이렇게 의미있게 꾸며가는 것이 훨씬 값진 일인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저자는 '집중적인 연명의료를 받은 환자와 마약성 진통제로 안정을 유지한 환자의 수명이 비슷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어차피 같은 나날을 산다면 진통제를 맞더라도 버킷리스트를 이뤄가는 것이 더욱 의미있는 일일 것임은 확실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명백히 사망단계로 진입한 환자에 대해서도 검사와 치료를 계속하는 경우가 있다. 설사 이런 의료 행위가 아무런 이득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이때 우리는 이것이 환자입장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이중효과의 원리에 따라 이득과 손실을 따져 봐야 한다.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지 못하고 고통을 유발하거나 지속시키는 것이 명확하다면 이는 환자를 위한 선생이라기보다는 악행이기 때문에 중단해야 한다. 어찌 보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인위적으로 연장함으로써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것일 수도 있다. (p. 171)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최소한 지금은 그렇다. 그 뭐냐, 머리를 통째로 갖다 붙이는 전신이식수술이 성행하지 않는 이상은. 아, 끔찍해!) 아기가 탄생할 때 아기의 건강과 편의를 위해 이런저런 환경적 요소들을 고려하는 것처럼 삶을 마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고통 없이 인간다운 삶을 살다가 안락한 곳에서 눈을 감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죽음이 아닐까? 살아있는 국민에 대한 편의와 배려조차 부족한 이 나라에서 죽음에 대한 논의는 너무 앞서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든 언젠가는 죽으리란 걸 생각한다면 탄생에 신경 쓰는 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 아픈 사람 아프지 않은 사람 가진 사람 없는 사람 모두가 존중받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