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전작인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도 제목이 정말 탁월했지만, 이번 저서도 마찬가지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대표 정당인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을 가리켜 각각 '익숙한 절망'과 '불편한 희망'이라고 이름붙인 것인데, 어쩌면 이렇게 딱 들어맞는 수식을 붙였는지. 이 나라 국민으로서 어느 쪽도 선뜻 표를 던지고 싶지 않은 '국민의 대표자'들이다. 국가가 처한 현실이 암담하고 걱정스러워도 진실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는 올바른 지도자들이 있다면 머잖아 그 국가는 정상 궤도에 올라 발전해갈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이 좋아도 그 현재를 이끄는 이들이 아무 생각도 비전도 없다면 가진 것을 모두 잃고 말 것이 뻔하다. 걱정스럽게도 우리나라는 현재 상황도 그다지 좋지 않을 뿐더러 나라를 이끄는 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어 잃을 것밖에 남지 않았다.
좌파와 종북은 얼마든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는데 '종북'과 '좌파'를 한데 묶어 '종북좌파'로 싸잡는 행태는 더 비열하다. 노인 유권자들은 이 수법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으로 반응한다. 새정치연합과 여타 진보 정당은 번번이 새누리당이 색깔 공세를 펼칠 여지를 준다. 한국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을 손쉽게 공격하는 비열한 수법은 또 있다. 진보 진영이 '포퓰리즘'을 일삼는다는 주장이다. 일반 대중의 감정이나 필요에 영합해 표를 얻는 것이 '포퓰리즘'이지만, 한국 보수 언론이 지적하는 '포퓰리즘'은 이와 다르다. 한국 보수층에게는 특권층의 희생으로 다수의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것이 모두 '포퓰리즘'이다. (p. 35)
그러나 한국에서는 대기업 우선주의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시장이 존재한 적이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앞으로도 그것이 영영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대기업이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업 기회가 생겨도 금세 대기업 차지가 되며, 대기업의 독주에 방해되는 존재들은 금세 박살나고 만다. (중략) 전경련이 내세우는 자유시장은 미국 신자유주의자들이 열렬히 신봉하는 자유시장과 다르다. 미국에는 진정한 자유시장이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미국 전 공화당 하원의원 론 폴과 같은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시종일관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려고 애쓴다. 반면 한국의 사이비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정부가 허가해주는 독과점 혜택을 누려왔고, 막대한 규모의 정부 계약을 따내고 국민의 혈세로 제공되는 전기 사용료 등의 보조금을 받으면서도 사회에 기여하라는 요구에는 사회주의 운운하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나 먼저'라는 믿음 외에는 별다른 철학이 없다. (p. 71)
문제는 젊은이들에게 있지 않다. 합리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의제를 내세운다면 누구라도 수긍할 것이다. 진짜 문제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의제를 제시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에 진정한 중도좌파 정당과 진정한 중도우파가 있으면 좋겠다. 정의당은 진정한 의미의 진보 정당이라 할 수 있지만, 주류 유권자들에게는 아직 지나치게 진보적이거나 좌파 정당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 새정치연합은 과거에 대한 인식을 통해 정의되는 정당이다. 물론 새누리당도 박정희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아직까지 숫자에 집착하며(이명박의 747정책, 박근혜의 474정책) 20세기 후반의 개발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점에서 새누리당을 보수당으로 보는 것은 오류다. 다른 나라의 보수당과 비교했을 때 새누리당의 사고방식이나 전통에 대한 태도 등에서 도덕적으로 보수적인 관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상 GDP 성장 외에는 아무런 기본 철학이 없는 정당이다. (p. 75)
우리나라의 경제 지도층이나 정치 지도층 어느 쪽이고 할 것 없이 그저 틀어쥐고 있는 것들을 계속 틀어쥐고 있기만을 원한다. 당연한 일이다. 처음부터 아예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기란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아무래도 쉽지 않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과하게 틀어쥐고 있을 경우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가지지 못한 쪽의 박탈감이 생겨난다.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의 안전 수준을 낮추게 되는 원인이 된다. 안전하지 못한 사회는 행복하지 못한 사회가 되고, 행복하지 못한 사회는, 글쎄, 존재 가치가 있을까? 그러므로 모두가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공평한 사회'라고는 썼지만 모두가 50을 가진 사회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공평한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그러한 시스템이 부족하고, 새누리당은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데에 소극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공평한 사회'란 그저 캐치프레이즈에나 등장하는 죽은 언어로, 그런 사회가 더 행복하건 말건 일차적으로는 그들로선 가진 것을 빼앗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정치민주연합을 필두로 한 야당들이 시스템을 만드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 하지만 이 나라의 가장 큰 불행은 그런 역할을 할 야당이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다는 데 있다.
새정치연합은 유권자를 설득하는 일에 늘 젬병이다. 새누리당을 비판하고 정부 인사들의 스캔들을 공격하는 등 어부지리식 승리에만 기댈 뿐이다. 포지티브 선거를 통해 왜 새정치연합을 선택해야 하는지 보여주지 못한다. 포지티브 선거가 가능하려면 더 나은 나라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는 정책 기반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새정치연합은 차기 정부라기보다는 만년 야당처럼 행동한다. 만년 야당처럼 행동하면 야당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새정치연합의 비극이다. (p. 123)
좀더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대북 문제에 '진보적인' 것이 정말 진보인가? 북녘 땅에 있는 최빈곤층이나 위험에 처한 북한 주민은 걸리적거리는 존재쯤으로 여기면서, 자국민에게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북한 지도부에는 무한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 강자에게는 약하게, 약자에게는 강하게 구는 것 아니고 무엇인가? 한국 정치를 통틀어, 북한의 현 상황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북한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은 외면하거나 그 심각성을 축소하는 진보의 태도보다 더 싫은 것은 없다. (p. 143)
여당인 새누리당이 싫지만,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도 똑같이 싫다. 그나마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까지는 그래도 (당시의) 민주당에 기대를 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곧 좌절당했다. 그러다 안철수가 샛별처럼 나타나 기대를 걸었고, 머잖아 다시 좌절당했다. 글쎄, 지금도 누군가 인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 이후로 야당을 포함해 정치 쪽에는 오만정이 다 떨어져 버렸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새정치민주연합은 국민들이 현실을 바꿔줄 대안으로 여겨 지지하기에 여당과 별 차이 없는 '정치인' 족속일 뿐이다. 자기들 배 불리는 데에 급급하고 정치 행동이라고는 그저 새누리당이 하는 일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 정말 무능력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이 나라의 '보수'가 진정한 보수가 아니듯이 '진보'도 진정한 진보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약자의 편이 되어 주지 못하고 있어 결국 생각이 깨어 있는 유권자들은 그 어느 쪽도 선택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한국이라는 환경에서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진보 언론은 정부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의 성향을 강화시킬 뿐이다. 이대로는 KBS 뉴스처럼 미묘하게 편향된 주류 언론에 영향을 받는 중도 유권자층을 설득할 수 없다. 정말 효과적인 정부 비판 언론이 되려면 진보적이되 합리적인 관점에서 때로는 정부를 칭찬할 줄도 알아야 한다. 또한 건강, 생활, 음식 같은 주제처럼 비정치적인 '소프트'한 내용도 보강해야 한다. 지적이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미디어를 지향해야 한다. (p. 67)
성공 지향적인 한국 사회에서 진보 진영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은 부자를 벌하는 정책이 아니라 진보적이되 유권자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회계층 고착화가 더 심한 나라도 마찬가지다. 네거티브 전략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대표 얼굴만 바꾸거나 계층 간 투쟁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는 포지티브 전략을 구사해야 진보 진영이 이길 수 있다. (p. 120)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새정치연합의 대북포용정책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며 북한과 외부 세계, 특히 한국인들과의 교류를 증진할 수 있는 정책이라면 무엇이든 강력하게 지지한다. 또한 북한과의 경제 협력 강화에는 찬성하고, 경제 제제에는 반대하며(경제 제제는 어차피 별 효과 없다), 국가보안법은 철폐하거나 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자국민에게 저지르는 북한 정부의 만행을 규탄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 북한 정부 입장에 서서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용인하면 안 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원칙들이다. (…) 새정치연합은 햇볕정책을 뒷받침하는 전략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필요할 때 더욱 강력하게 북한 정부를 비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권유린 문제를 직시하고 탈북자를 배려해야 한다. 그런데 새정치연합은 탈북자에게 막말을 퍼부은 임수경을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선출했다. 선거에서 계속 지고 싶고 1980년대에 머무르고 싶다면, 아주 탁월한 선택이다. (p. 144)
저자는 진보 언론이나 야당이 선두에 나서기 위해서 유념해야 할 사항까지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진정한 진보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만일 그들이 진정한 진보였다면 지금처럼 이도 저도 아닌 형태로 비난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시대를 앞서간 탓에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삿대질을 당할지언정 진보를 바라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무시당할 일은 없었을 거란 이야기다. 이 나라의 '보수'는 바꿀 수 없다. '보수'는 바뀌지 않기 때문에 보수이니까. 그러나 진보를 표방하고 있다면 진보는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진보란 지금 처해 있는 상황보다 늘 한발 앞서 나가야 진보이므로.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고 전반적인 사항만 인지하고 있는 나도 전혀 어렵지 않게 쉬이 읽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저자의 의견에 깊이 공감하면서 한숨도 여러 번 내쉬었다. 그리고 바뀔 여지가 있어 보이는 정치인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바뀐다면 망설이지 않으련만...
저자의 생각에 90% 이상 동감하지만 반감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93쪽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한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담배, 음주, 운전중 통화가 더 위험하지 않을까?' 문장 이하의 단락 내용이다. 미국산 쇠고기가 담배나 음주, 운전 중의 통화보다 덜 위험하면 그것에 대한 경각심을 낮춰도 되는가? 담배나 음주, 운전 중의 통화를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만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는가? 이런 식의 비교는 그야말로 멍청하기 짝이 없다. 일상적인 식품인 쇠고기와 기호품인 담배나 술이 비교 대상이 되는가? 담배와 음주, 운전 중의 통화는 본인의 의지 여하에 따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냥 쇠고기'가 아니라 '미국산 쇠고기'는 자신만의 의지로 섭취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책에서 적었듯이 우리나라는 낮은 신뢰도를 보이는 사회이다. 미국산이 아닌 타지역의 쇠고기를 먹고 싶은 사람이 본인도 모르게 미국산 쇠고기를 섭취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메뉴판에는 뉴질랜드산이라고 적어두고 미국산을 파는 곳이 한두 군데랴. 또한 가공식품 원료 원산지를 명확히 기재하도록 법령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그저 '쇠고기(수입산)'이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원치 않아도 섭취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 꽤나 많을 것이다. 저자는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한지 아닌지는 모르지만'이라고 적고 있는데, 모른다면 그냥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 이후 나는 폴로 베지테리언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 어느 누구도 미국산 쇠고기를 찾아 먹거나 사 먹지 않는다. 정육점에서는 한우나 호주산을 구입하고, 고깃집에서는 호주산을 먹는다. 하지만 그들이 먹는 것이 진짜 '호주산'인지, 마음놓고 젓가락질을 할 가족이나 지인들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