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 문장의 앞부분은 책의 물성 그 자체만 보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작가가 내어놓은 이야기를 백지 위에 옮겨담고 독자들의 눈길을 끌 표지를 씌워 서점에 내놓는 것은 출판계 사람들이 하는, 눈에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우리가 늘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다. 한 권의 책이 사람의 내면에서 변화를 불러일으켜 그가 어떤 다른, 과연 보다 더 나은 인격의 인물로 바뀌는가 하는 것은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품성이 바뀌는 데엔 수많은 환경 요소들이 관여하므로 그 변화가 반드시 책 때문이라고 확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일 환경을 통제하는 실험이 가능하다면 책이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으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실험용 기니피그가 아닌 인간을 대상으로 환경을 통제하는 실험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사회에는 이미 통제된 환경에 놓인 이들이 존재한다. 바로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다. 저자 로라 베이츠는 그들에게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소개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는데다 고대 영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고리타분한 예법에 따라 핵심을 빙빙 에둘러 표현한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쉽지 않은 대상이다. 저자 역시 반신반의하며 죄수들을 상대로 셰익스피어 강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모두의 냉소와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죄수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담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통찰력에 반응한다. 죄수들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왜 반성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이 죄를 저지르고, 혹은 저지르기 전에 고뇌하는 모습을 보자 자기들이 경험했던 바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등장인물들이 고뇌하고 있는 점에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비춰가며 서로 생각하는 바를 토론하면서 지향점을 찾고 다시 한번 심사숙고하는 기회를 갖는다.
물론 그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것은 사회에서는 당연히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달리 할 일이 없어서다. 이런 자유의 제한이 그들을 책으로 집중하게 만든 것이다. 아마도 감옥 안이 아닌 사회였다면 이 불량배들이 셰익스피어에 심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 그들의 변화가 단순히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이 훌륭하기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통제된 환경이 '셰익스피어 효과'를 극대화시킨 셈이다. 그러나 자의건 타의건 죄수들은 자신들이 저질렀던 범죄를 되돌아보기 시작했고,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토론과 수업은 충분히 뛰어난 가치를 지닌다.
처음에 나는 굳이 셰익스피어가 아니라도 최근의 어지간한 소설이면 이 우리에 갇힌 사람들을 흔들어놓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진정한 삶을 향한 작은 창문을 열어 줄 문학작품이었으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현대 소설 형식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휘황찬란한 문장을 표현해내기는 어렵다. 다른 문체로 범죄자의 심리 상태 등을 표현할 수도 있으나 이 고상한 시적 언어가 가진 울림과는 아무래도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다. 그러므로 반드시 셰익스피어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셰익스피어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저 노크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가?
나는 왜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싹해지는가?
이 손은 누구의 손이란 말이냐? 아! 이 손이 내 눈을 뽑아내고 있구나.
위대한 바다의 신 넵튠의 그 많은 바닷물이면
내 손에서 이 피를 깨끗이 씻어낼 수 있을까? 아니, 이 손이 오히려
드넓은 바다를 진홍빛으로 물들여
푸른 물을 핏빛이 되게 하리라.
─생략─
내 행위를 생각하느니, 차라리 나 자신을 잊는 게 낫겠다.
-『맥베스』2막 2장
(중략)
진짜 살인자 맞네요. 와! 통찰력 있어요! 이 공포와 혼란과 불안이라니! 작가가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요. 마치 사람을 죽이려는 시도를 해봤거나, 살인하려는 순간에 그 공포와 극심한 불안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처럼요! 덩컨 왕을 죽였을 때, 맥베스는 환상의 세계에 빠져 있었어요! 무기를 두고 오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요! 쌤, 이 장면 진짜같이 정말 생생해요. 공포와 혼란, 속 뒤틀리는 불안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기괴해요!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저는 그런 경험이 있군요. (p. 124)
래리 뉴턴은 가석방이나 항소가 불가능한 무기징역수로 이 책의 저자 로라 베이츠가 각별히 아끼는 학생이다. 그는 열일곱살에 교도소에 들어가 서른살이 넘도록 형을 살고 있었다. 지저분하고 비좁은 독방에 갇혀 오랜 시간을 혼자 지내야 했고 출소의 희망도 없었다. 그런 구차한 삶을 살던 그가 자살을 고려하기 시작했을 때 저자가 셰익스피어 수업을 열었다. 여기서 래리는 희망의 빛을 발견한다. 그것이 그의 삶에 무슨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고 가석방이나 항소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큰 변화가 생긴다. 자신과 같은 고통을 느끼며 번민하는 책 속의 인물들에게서 연민과 동질감을 느꼈고, 그들이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추락할 때는 본인의 죄과를 떠올리며 반성하였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이 변화는 그에게 다른 세상을 선물한다.
래리는 셰익스피어 문학박사의 꿈을 갖게 되지만 그 꿈은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교도소 당국 등이 그의 변화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미성년자에게 너무나 가혹했던 처벌─가석방이나 항소가 금지된─이 드러날까 두려워 은폐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싶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는 무서우리만치 무거운 벌을 내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들에게 진정한 갱생의 기회를 줄 수 있다면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의 죄에 대해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고 세상을 불신과 혐오의 눈으로 노려보는 인물을 그냥 어딘가에 묻어두거나 죽이는 것보다는 한 명의 선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더욱 값진 일이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래리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길 기대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욱 위험한 인물로 취급되어 수업을 받을 수도 없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삶이겠지만, 셰익스피어의 연구에 그토록 흠뻑 빠져있고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뉘우친 범죄자가 선한 인간이 되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기적 같은 삶도 때로는 일어난다는 것을 믿고 싶어진다.
"셰익스피어가 누군가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저자가 던진 질문에 래리뿐만이 아니라 셰익스피어를 함께 공부한 죄수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셰익스피어가, 그들 자신의 삶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미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을 이들을 구했다고.
최근, 쓸데없이 소설을 뭐하러 읽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이 집어들고 있는 자기계발서를 집어던지고 이 책을 그 손에 쥐어주고 싶다. 소설은 인간의 삶을 구원하는 궁극의 보루이기에 읽는 것이라고 일러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