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강자에 의해 씌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약자에 의해 흘러간다. 역사책에는 승리자들이 기록한 자기정당화의 구구절절한 변명들이 길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의 흐름을 보면 언제나 약자가 그 마지막에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역사 속 많은 나라들은 땅을 점령하고 세상을 호령하였으나 후에 탄생한 약소 세력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위정자들은 백성의 위에 군림하며 그들의 고혈을 짜내기에 바빴다. 그러나 지금 그 위정자들은 시간과 역사의 몰락과 함께 사라지고, 그들의 발밑에 짓눌려 있던 백성들은 민주주의를 일으켜 자기들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기존의 강자들은 역사책 속에 파묻히고 그 뒷 페이지에는 그 시대의 약자들이 새로운 강자가 되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 모든 사회 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과거, 여성들은 남성의 그늘에 묻혀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했고 여성은, 비록 아직도 뒤쳐져 있긴 하지만, 남성과 비슷한 수준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이 이러한 힘을 지니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문학, 특히 소설이 큰 영향을 미쳤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여성에게는 성경과 설교집을 읽는 것만 허락되었다. 소설은 금지되었는데, 여성이라는 성은 "외부의 돼먹지 못한 영향과 내면의 무질서로 말미암아 탈선할 위험이 큰 것으로 여겼으며", "특히 연애소설은 그 악마 같은 힘이 침입하는 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소설이 여성으로 하여금 음란과 방탕에 눈을 뜨게 해 쾌락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든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남성중심사회가 만들어낸 환상으로서 남성이 여성에게 성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을 구속하기 위해 성립된 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부당한 편견은 여성이 육체적인 면에서 남성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기에 깨어뜨릴 수 없는 상식처럼 굳어지고 만다.
소설은 경험의 촉매제였다. 소설은 종교나 철학, 하물며 도덕에 갇히지 않은 "열린 시스템"으로서의 삶을 보여주었다. 여러 가지 결정과 우회로, 놀라운 반전과 예기치 않은 결말, 마음이 원하는 길과 머리가 원하는 길, 나의 세계…… 바꿔 말해 소설은 엄청나게 현실적이었다. 소설 속 사건들이 왕왕은 환상적으로 느껴질지라도 말이다. 소도시에서조차 그 들썩거리는 과장이 느껴졌던 소설과 혁명은 많은 여성의 반항 정신을 자극했다. 여성들은 이제 자신의 현재의 삶을 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고, 종종은 극히 나쁜, 최소한 개선해야 하는 상태로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성의 삶과, 그로써 또한 남성과 아동의 삶은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이 변하기 시작했다. (p. 142)
이 책에는 그러한 틀을 깨부수는 데 자기도 모르게 일조하게 된 인물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파괴의 시작은 의외로 남성들로부터였다. 남성에 비해 억압되고 제한된 환경에 놓인 여성의 삶은 남성 소설가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 소재였다. 이야기 속에 여성의 삶을 그려내면서 소설가들은 핍박받던 주인공에게 해피엔딩이라는 선물을 주거나 새드엔딩을 마련해 놓아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기본적으로 소설가란 약자의 편을 들 수밖에 없기에 이러한 과정에서 남성들이 기존에 만들어 놓은 족쇄를 건드리는 이야기들이 탄생한다. 그리고 마침내 여성들이 직접 이야기를 창조하기 위해 펜을 든다. 하지만 여성이 소설을 쓰는 것은 사회 통념상 부도덕한 것으로 비춰지고 여성이 쓴 글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하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많은 여성 작가들이 필명을 남성의 이름으로 하여 책을 내거나 또는 'By a lady'라는 식으로 익명 처리해 책을 낸다. 이러한 변화는 소설이 보여준 다양한 삶에서 얻은 지식이 여성들로 하여금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깨닫게 한 데서 기인한다.
18세기의 여성 독자들은 결코 수동적인 수용자들이 아니었다. 많은 남성의 생각과 달리, 여성들은 독서나 독서로 인한 엉뚱한 환상이나 소망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감독해주어야 하는 위험한 족속이 아니었다. 여성들이 당시 감수성을 가지고 집중해서 소설을 읽은 것은 소설이 여성들이 당면한 삶의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유일한 매체였기 때문이다. 소설은 사랑과 정열의 약속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삶에서 위대한 사랑 외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소설들을 너무 일방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고, 그런 생각을 이데올로기로 폭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200년이 넘는 시차를 두고, 심리분석에서 젠더 연구까지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이론을 돌아보며 회고적인 입장에서나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반면 당시를 살아가던 여성들에게 그런 소설들은 자기이해와 자유를 위해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수단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여성들의 감정의 동요와 관심사,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이 언어로 표현되어 있었고, 여성 독자들은 이런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했다. 이것은 자의식과 해방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리하여 18세기 번역들은 주로 여성 독자들의 몫이었다. 소설을 만나고, 그것을 다른 여성 독자들에게도 소개하고자 했던 것이다. (p. 58)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은 위에 적은 것처럼 여성이 "외부의 돼먹지 못한 영향과 내면의 무질서로 말미암아 탈선할 위험이 큰" 성임을 밝히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저자는 플로베르가 글을 쓴 의도는 여성이라는 성이 그렇더라, 하는 편견을 옹호하고 위해 쓴 것이 아니라고 적고 있다. 만일 플로베르가 그런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면 여성 독자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에서 "삶은 불쾌한 일들로 가득해서, 이를 견디는 유일한 수단은 피하고 보는 데 있지요. 우리는 예술 속에서, 부단히 진실을 추구하는 가운데 그런 불쾌함을 피할 수 있습니다"라며 독서를 권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스무 살 남자라면 세계여행을 권하겠지만, 좋아요! 방안에 앉아서 세계를 여행해도 됩니다!" 그는 독서 행위가 여성을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엠마는 여성으로서 살아야 했던 "지루하고 황량한 삶을" 독서를 통해 메꿔나갔다. 그런 가운데 시어머니와 남편이 엠마의 독서를 금지시킨다. 엠마로선 유일했던 탈출구가 사라진 셈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공허한 삶을 다시 다른 것으로 메꾸기 위해 혼외정사를 벌이게 된다. 결국 독서 행위가 엠마를 타락시킨 것이 아니라 여성의 숨 막히는 삶이 그녀를 타락시킨 것이고, 독서 행위는 그녀가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직전 매달려 있던 동앗줄이었던 것이다.
검찰이 플로베르의 소설에 대한 재판에서 언급한 것처럼 엠마 보바리는 결코 간통을 저질렀기에 죽는 것이 아니다. 플로베르는 결코 엠마의 죄악을 심판하지 않는다. "그녀는 찬란한 젊음과 아름다움 가운데 죽는다. 두 연인을 가져본 후, 자신을 사랑하고 숭배했던 남편을 남긴 채. 이제 남편은 로돌프의 초상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로돌프의 편지와 레옹의 편지를 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이나 자신을 배반한 여인의 편지를 읽게 될 것이고, 그 뒤에는 그녀를 더욱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죽음을 뛰어넘어서 말이다." 검사는 "누가 책 속의 이 여인을 비난하랴?"하고 묻는다. 이 질문에의 그의 대답 역시 정확하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검사는 이 책에서 그녀보다 우월하여 그녀의 행동을 상대화할 인물을 찾고자 애썼지만 "그런 인물은 없었노라, 유일하게 우월한 여인은 보바리 부인이었노라."라고 말한다. (p. 219)
소설도 아니고 생각보다 두껍지만(414페이지) 금세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생각보다 여성 독서가 시작된 시기가 빨랐던 것이 의외였고, 저자가 적고 있듯이 20세기 이전에 여성이 집필한 작품이 그리 드물지 않다는 것 또한 새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그간 문학사가 중재한 잘못된 선입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20세기 초반까지 여성 작가의 수가 엄청나게 적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p. 127)") 또한 남성이 여성보다 책을 읽지 않게 된 것이 최근이 아니라 이미 19세기 초반 이전부터였다는 것도 놀라웠다. 아마도 그 전 시기에는 여성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기에 남성의 독서율이 높은 것이 당연했으리라. 예전에 저자 슈테판 볼만의 책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를 읽고 내용이 너무나 부족하단 생각에 아쉬웠는데, 이렇게 (조금 더) 상세히 여성 독서의 역사를 알 수 있어 무척 흡족하다.
다만 조금 아쉬운 부분은 영국의 TV 드라마 '다운튼 애비'를 '다운타운 애비'와 '다운 톤 애비'로 틀리게 통일하지도 못하고 표현한 것이나,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 관련하여 등장인물 헤르미온느의 이름을 헤르미온으로 표기한 것 등이 눈에 거슬렸다. 374페이지 마지막 줄에서는 '말하는 모자가 해리의 친부모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를 슬리데린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로 적고 있어 오기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런 사소한 부분을 바로잡는다면 더욱 완벽한 책이 되겠다. 물론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이 책에 대해 묻는다면 적극 추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