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브라운과 스누피가 나오는 만화를 TV에서 보았던 때가 언제쯤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그런 만화를 보았었다는 기억이 날 뿐이고, 집에 잠시 함께 살았던 이모가 선물처럼 남겨두고 간 스누피 인형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보니 좀 더 가깝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단지 이제는 흘러가버린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었는데, 갑자기 작년 말 정도에 이 만화 <피너츠>와 관련된 책이 쏟아져 흐릿한 옛 추억을 탈탈 털어 뒤집어 보게 됐다. 그래봤자 기억나는 거라곤 대머리 꼬맹이 찰리 브라운와 냉소적인 강아지 스누피, 담요를 끌고 다니는 아이가 나오는 만화가 전부였다. 그리고 찰리 브라운이나 스누피 둘 중 하나의 이름이 제목이려니 추측했다. 이 만화 제목이 <피너츠>였는지는 이제야 알게 됐다. 그렇게 굉장히 오래된 듯한 느낌의 기억이었는데, 저자는 지난 2000년도까지 무려 50여 년이나 연재를 하다가 사망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만화 <피너츠>를 어떻게 그리기 시작했고, 어떤 식으로 그려왔으며,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는지, 자신의 생활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릴 때는 어떤 아이였는지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다. 잡지 등지에 쓴 에세이 등을 모아둔 것인데, 마치 일부러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처럼 조밀하게 잘 짜여진 자서전과 다름없게 되어 있다. 만화 작가였지만 훌륭한 에세이스트이기도 했던 듯 하나하나의 글이 만화에서처럼 명랑하고 어느 정도는 교훈적인 내용의 완결성을 지닌다. 이는 마치 찰스 슐츠라는 그의 인생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선착순 500명에게 캔디바를 주는 행사에서 501번째가 되는 등 여러 가지 일에서 고대했던 일을 하지 못하는 일을 겪는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그의 성실함과 끈기와 집념, 완고함 등이 바로 그의 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코믹 스트립이라고 불리는 짧은 컷 만화만을 무려 50년이나 그린다는 건 평범한 사람이라면 정말 생각도 못할 일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게 있다고들 한다. 무슨 일이든 1만 시간을 하면 어느 정도 숙달되어 달인이 되는 길에 들어선다는데, 평범한 사람들은 그 1만 시간(416일)을 끈기 있게 파고들지를 못한다. 헌데 찰스 슐츠는 50년을 한 우물을 팠으니 그와 그의 <피너츠>가 사랑받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야말로 존경스러울 뿐이다.
나는 매일 일하러 가는 것이 즐겁다.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이라면 내가 한 번도 '일'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테지만 말이다. 어떤 날에 여유가 없다고 말해야 할 때면 나는 언제나 "작업실에 가서 그림을 좀 그려야 해서 안 되겠어"라고 한다. 이건 어쩌면 미신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고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 같다. 내가 내 삶에서 완벽하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상황 중 하나는 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작업대 앞에 앉아 있을 때면 내가 내 삶을 주도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작업실에 있으면 기분이 편안해지고, 내가 이때까지 그려 온 많은 작품에 꽤나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나는 만화라는 영역의 진보에 내 몫의 기여를 했다고 믿는데 이 역시 자랑스러운 점이다. (p. 170)
자신이 저지른 탈선이나 나쁜 짓을 책에는 적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정말 무척이나 바른 삶을 산 것 같다. 일단 역시 50년 동안 자신의 일에 질리지도 않고 한결같이 임했으며, 독실한 종교인이었고, 야구 경기 관람이라는 참으로 건전한 취미를 가졌다. 또, 모두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땅에 빙상 경기장을 짓기도 했다. 어쩌면 그리 관련 없어 보이는 듯한 단락에서도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데, 착한 사람의 일면이 드러난다. 그리고 <피너츠>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꽤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고뇌할 수 있게 하려면 저자 자신부터가 생각이 깊어야만 한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 착하지 않을 리 없고 착한 사람이 바른 삶을 살지 않을 리가 없는 법이다. 나 같은 사람이 생각하기에도 저자는 조금 단조로운 삶을 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빚어낸 <피너츠>라는 창조물을 보면 일상의 단조로움이 예술의 영역을 해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아픔이 있어야 예술이 꽃 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또 어떤 예술가들은 마음이 평화로워야 창조력이 샘솟는다고 하니 다 사람 나름인 것 같다.
집에서 떠나 있을 때 느끼는 불편한 마음은 내가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두려움에서 온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짧은 휴가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리라. 이를테면 빙 크로즈비 프로암에 출전하러 가는 그런 휴가 말이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그 대회에 자주 가는 편이다. 거기에는 초대를 받았다는 데서 오는 놀라운 기쁨도 있다. 몇 년 전에 그린 코믹 스트립에서 찰리 브라운의 여동생 샐리가 자신은 무슨 여행이든 간에 집에 정오까지 돌아올 수만 있다면 괜찮다고 말한다. 나는 샐리의 마음을 이해한다. (p. 94)
그러나 <피너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키피와 그 친구들보다 훨씬 어렸고, 나는 그 캐릭터들을 자동차 사고를 당하기 쉬운 갓돌에 앉히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나는 늘 아이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길가에서 떨어진 곳, 계단을 내려오면 있는 인도 끝에 그렸다. 코믹 스트립의 후기에는 이런 구도가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므로, 나는 결국 아이들을 돌담 옆에 서 있는 모습으로 바꾸어 그리게 되었다. (p. 255)
살짝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 웃음이 나오는 모습이다. 내가 웃는 이유는 위의 인용구에 드러난 저자의 모습이 나 같기 때문이다. 여행에 대한 동경은 있지만 막상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불안해져서 모두 집어치우고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80% 정도 차지하고 만다. 미리 다 예약하고 난 뒤면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가게 되고, 그러지 않으면 그 과정까지 진행시키기가 어렵다. 그래서 일부러 '어쩔 수 없이'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또, 외출을 했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집에 가고 싶어져 나도 모르게 바른 생활을 하게 된다. 만화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차도가 있는 길가에 앉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것까지도 십분 이해가 간다.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을 하면서 그저 게임일 뿐인데도 이상한 곳에 딸을 보낼 수 없어 늘 비슷한 엔딩을 봐야 했더랬다. 필요 이상으로 너무 감정 이입을 했던 건지 어떤 건지 그 상상 속의 선을 뛰어넘기가 참 어려웠다. 스스로 참 꽉 막혔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찰스 슐츠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되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계속 막혀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런 걸까? 헷~
기대하지 않고 읽었으나 저자의 성실성과 끈기에서 정말 감탄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게 부족한 것이 바로 끈기인데 이처럼 면면히 본받아야 할 끈기를 가진 사람이라니. <피너츠>를 꼭 봐야겠다. 이번 화이트데이엔 <피너츠>를 사 달라고 신랑님께 주문해 두었으니 곧 찰스 슐츠의 생각과 끈기가 녹아들어간 작품을 만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