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너그러워지는 걸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빌 브라이슨이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 산책>에서보다 나이를 먹어서 너그러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게 아니라면 빌 브라이슨이 유럽을 여행했을 때보다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하러 들렀을 시기가 좀 더 21세기에 가까웠고,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가 더 발전되고 더 편리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 너그러운 태도를 보인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것도 아니면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은 의뢰를 받고 하는 거여서 비교적 너그러운 태도를 갖출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그만큼 유럽 여행을 하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코믹하지만 냉소적이었던 아저씨는 여전히 유쾌하긴 했으나 너그러워지고 둥글어졌다. 나로선 조금 안타까웠다. 다소 불친절하고 비꼬는 걸 좋아하는 아저씨가 좀 더 내 취향이었는지 유럽여행기 쪽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불평을 해달란 말이야, 불평을!!) 그럼에도 이처럼 말은 많으나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는 여행기들 중에서는 가장 재미있는 여행기일 거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물론 이 밖에도 내가 오스트레일리아를 좋아하는 이유는 많다. 그리고 지금 이 책에다 그 이유들을 남길 수 있어 무척 흐뭇하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민은 대단히 호감이 가는 사람들이다. 쾌활하고, 외향적이고, 재치 있고, 한결같이 자상하다. 이곳의 도시는 안전하고 깨끗하며 거의 대부분 물하고 가까운 곳에 건설되어 있다. 거기에는 부유하고 질서 정연하고 본능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있다. 음식이 훌륭하다. 맥주가 시원하다. 태양이 거의 언제나 빛난다. 길모퉁이마다 커피가 있다. 루퍼트 머독은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살지 않는다. 이보다 더 멋진 삶은 찾아볼 수 없다. (p. 20)
<~유럽 산책>에서 저자가 이렇게 휘황찬란한 칭찬을 한 적이 있었던가? 거의 배신감이 느껴질 만큼 지극한 칭찬이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유럽보다 나은 점이 있기야 하겠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닐 것 같은데 칭찬이 과하다 보니 오히려 살짝 반감이 든다. 그렇다고 책 전체에서 입에 발린 칭찬만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가 유럽 범죄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나 다른 인종의 이주를 막기 위해 백호주의를 택했던 것, 땅의 원주민인 애버리저니에 대한 살육의 역사와 지금껏 계속되는 차별과 부족한 지원 등에 대해서도 일컫고 있다. 다만 이러한 지적이 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 전체에 비교해서는 적은 편이기 때문에 칭찬 일색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럽 산책>에서는 저자가 많은 국가를 한정된 페이지 안에서 다뤄야 했다. 그러니 칭찬을 늘어놓을 페이지도 그만큼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온통 오스트레일리아라는 한 국가만을 다룬다. 그 면적이 유럽 몇 개국을 합한 것보다 넓고 크다 하더라도 하나의 문화를 가진 하나의 나라에 불과하다. 칭찬이든 불평이든 적어내려갈 페이지가 남아돈다. 그래서 그 빈 공간을 칭찬으로 마구 채운 모양이다. 뭐, 다른 나라의 이미 지나간 역사에 대해 한낱 여행자가 분노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여행자에겐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그 순간이 가장 중요한 법이니.
윌리엄 J. 라인스는 <거대한 남쪽 땅 길들이기>에서 정착민들이 원주민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상세히 기술했다. 개 먹이로 주기 위해 애버리저니를 살해한 일, 애버리저니 여인 눈앞에서 남편을 살해하고 베어낸 남편의 머리를 목에 걸고 다니게 한 일, 나무 위로 도망치도록 몬 다음 밑에서 라이플총을 쏘아 고문한 일. 라인스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총알을 맞을 때마다 그녀는 나뭇잎을 뜯어 상처에 쑤셔 넣었다. 그러나 결국 목숨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P. 253)
20세기 말까지도 감염성 질환으로 사망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버리저니는 백인보다 열여덟 배나 많으며 폭력 사태로 말미암은 입원 사례도 열일곱 배나 많다. 사망 원인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출생시 사망하는 애버리저니 아이들의 비율은 백인에 비해 두 배에서 네 배 더 높다. 무엇보다 외부인이 보기에 가장 이상한 점은 애버리저니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이다. 텔레비전에서 연기하는 애버리저니를 볼 수 없다. 상점에서 근무하는 애버리저니를 볼 수 없다. 지금껏 의회에서 활동한 애버리저니는 단 2명뿐이다. 각료를 지낸 애버리저니는 전혀 없다. 원주민 부족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인구의 1.5퍼센트에 불과하며 대부분 시골 지역에 거주한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다수의 애버리저니를 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다만 은행에서 일하거나, 우편물을 배달하거나, 주차 위반 딱지를 작성하거나, 전화선을 수리하거나, 정상적인 직업 세계에서 생산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그들의 모습을 '이따금'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본 적이 없다. 한 번도. 어떤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p. 365)
비록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애버리저니가 당한 고통의 역사가 너무 끔찍해서 소름이 끼치고 마음아팠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들의 땅에서 이방인으로 겉돌고 있는 그들의 현재 또한 안타까웠다. 애버리저니의 삶의 터전과 방식, 그 모든 것을 빼앗은 백인들이 자기네 사회에서 애버리저니들이 바로 서지 못한다며 욕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분통이 터지기도 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바뀌는 이 기막힌 역설은 언제쯤 다시 제대로 뒤집어지게 될까? 그런 날이 오긴 할까? 애버리저니에 대해서는 요네스뵈의 소설 <박쥐>에서 처음 접했는데 이렇게 자세한 내용을 좀 더 알게 되어 좋았다. 내용 자체만으로 따지자면 인간에 대한 회의가 밀려들어 우울해지기만 할 뿐이지만 말이다.
그들은 영국의 분위기와 풍경이 그리웠다. 그래서 도시를 건설할 때 험프리 렙턴이나 캐퍼빌리티 브라운의 꿈처럼 전원적인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참나무, 너도밤나무, 밤나무 그리고 느릅나무를 배열한 영국 스타일로 공원을 설계했다. 애들레이드는 가장 건조한 대륙의 가장 건조한 주에 있는 가장 건조한 도시다. 그러나 공원만 거닐면 그곳이 어디인지 모를 것이다. 이곳은 영원한 서식스다. 안타깝게도 그런 구성은 원예 세계에서 이미 한물갔다. 이제 원래 심은 초목의 자연적인 수명이 거의 다했기 때문에 공원 당국은 외국에서 들어온 종을 모두 없애고 유럽인들이 오기 전 이곳에 서식하던 레드리버검나무와 맬리 관목 종류를 중심으로 강변 풍경을 재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토착 식물에 자부심을 갖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지만, 이 계획은 아무리 에둘러 말해도 유감스럽기만 하다. (p. 168)
1860년대 밸러랫 풍토순화학회는 여우를 수입했다. 여우는 곧바로 골칫거리가 되었고,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도망치거나 버려진 다른 동물들은 야생으로 돌아갔다. 낙타는 애들레이드에서 앨리스스프링스까지 철도를 부설할 때 이용했으나 공사가 끝난 후 풀어주었다. 오늘날 낙타 10만 마리가 중부와 서부 사막을 배회하고 있다. (중략) 이런 관행은 토착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130여 종에 달하는 오스트레일리아 포유류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16종은 이미 멸종했다. (중략) 동물 풍토순화주의자들이 그랬듯이 뮐러 역시 부족해 보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식물군에 만족하지 못하고 시간만 나면 전국을 누비며 호박, 양배추, 멜론 등 잘 자랄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씨를 뿌렸다. 특히 블랙베리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온 천지에 블랙베리 숲을 만들었다. 블랙베리는 현재 빅토리아에서 가장 해로운 잡초이지만 근절할 방법이 없어 모든 농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p. 184)
168페이지와 184페이지에서 저자의 태도는 왜 이리 다른 걸까? 168페이지에서 저자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오래 전에 들여왔던 외래종을 없애고 토착종으로 바꾸려는 데에 아쉬워한다. 공원의 아름다운 모습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184페이지에서는 그들이 들여왔던 동물과 식물들이 토착종을 밀어낸 것을 들먹이며 교훈 운운한다. 레드리버검나무와 맬리 관목이 대륙을 뒤덮고 있을 정도로 많이 살아있다고 해서 그게 다른 외래종을 들여와도 되는 이유가 되는지 모르겠다. 풍광을 위한 외래종은 괜찮고 식자재가 될 만한 식물은 안 된다는 것인가? 내가 보기엔 지금이라도 외래종을 없애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도가 옳은 것 같다. 동식물이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자연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이 정한 규칙은 너무 섬세해서 인간이 그 규칙의 전체 규모를 알 수 없고 규칙을 어겼을 경우 일어날 파장 역시 알 수 없다. 그러니 어지간하면 본래 존재하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우리 인간을 위해서도 가장 나은 일인 셈이다.
한 여직원이 내게 "방문객 팩 하나 드릴까요, 선생님?"이라고 물었다. 나는 필요 이상 감격해서 "오, 네,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방문객 팩은 묵직했지만 살펴보니 그냥 브로슈어 모음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전날 들렀던 방문객 안내소의 브로슈어를 모두 모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너무 무거워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늘어졌다. 한동안 팩을 끌고 다니던 나는 결국 어떤 화분 뒤에다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화분 뒤에는 노란색 봉지를 하나 더 놓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곳에는 이미 100개는 족히 될 만한 봉지가 놓여 있었다! 전시실을 둘러보니 그때까지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화분 뒤쪽 벽에다 내 봉지를 기대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한 사내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가 근엄한 목소리로 "여기가 비닐봉지 버리는 곳인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똑같이 근엄하게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P. 133)
다음 날 아침, 또 하루의 기나긴 운전을 위해 거창하게 배를 채웠다. 물론 아침 식사는 서양 사회에서 가장 야만적인 행사다.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면, 배아를 행복하게 먹어치우는 다른 경우를 제시해보라.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아침 식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침 식사의 핵심은 탁월한 베이컨이다. 영국의 말린 베이컨이나 미국에서 흔히 먹는 바삭바삭한 스트립과 달리 오스트레일리아 베이컨은 가공 처리가 덜 되고 육질이 많으며 정말 푸짐하다. 도망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돼지한테서 떼어낸 것 같다. 베어 물 때마다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근사하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식빵을 두껍게 자른다. 간단히 말해,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아침 식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콜레스테롤과 만족감에 한껏 고무된 채 한적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P. 151)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 산책>보다는 덜한 듯하지만 그래도 빌 브라이슨은 유쾌하고 재미있다. <~유럽 산책>을 읽어버린 속도에 비하면 4배는 느리게 읽은 듯하지만, 그건 이런저런 딴 일이 많아서이기도 했으니.
이 양반이 다음에 내놓을 여행기는 어느 나라를 대상으로 한 것이 될지 기대가 된다. 미국이며 유럽,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섭렵했으니 그 다음은 아시아 쪽이 되어야 할 텐데, 우리나라에 온다면 기대가 되기도 하지만 솔직히 극구 말리고 싶다. 그가 이 나라에서 성냥갑 건물로 가득 찬 영혼 없는 도시와 돈벌이에 골몰한 영혼 없는 사람들에게 치를 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그 냉소적인 유쾌함은 온데간데없고 진짜 차가운 미소가 깃든 비난의 말들만 적어내려갈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우리나라에 왔던 외국인들 중에 다신 오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이해가 되기도 한다. 국민들에겐 그 국민으로서 영원히 살고 싶은 나라였으면 좋겠고, 외국인들에겐 자꾸만 다시 가고 싶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아, 내 꿈이 너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