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물에 관심이 많다. 일단 살아있는 생명체인 만큼 사랑스럽고, 식물들이 존재함으로써 동물이 존재하게 되고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세포 같은 지구 생성 초기의 생명체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생명체의 근간을 만들어준 것이 바로 식물들이다. 그들이야 자기들 나름대로 삶을 영위해나가는 법을 터득했기에 그런 특이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겠지만 생각할수록 정말 신기하고 대견하다. 제대로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공간에서 생명의 끈기를 그토록 또렷하게 보여주는 걸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식물들은 그 싱그러운 초록빛과 여러 알록달록한 빛깔로 활력을 가져다주어 나를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화분 속 초록빛 작은 아이들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뿜어내는 살아있음의 기운에 가슴이 설렌다. 공기를 맑게 해주기까지 하니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 보니 이 책에 어찌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있으랴! 나무들의 이야기가 정말 흥미로운 데다 재미있기도 해서 부랴부랴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 엇갈렸다.
셋이 워낙 엉겨 붙어 있어서 100년을 넘긴 나무줄기들의 간격이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안 된다. 덕분에 내겐 아주 유익한 관찰 대상이다. 세 나무의 주변 환경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땅, 물, 지역의 미기후, 이 모두가 1미터 이내에선 차이가 없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참나무들이 다른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오직 각자의 다른 성격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셋은 다른 행동을 한다. 겨울에 잎이 다 떨어지거나 여름에 잎이 무성할 때는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나무들이 세 그루인지 알아채지 못한다. 수관이 서로 뒤엉켜 커다란 반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닥다닥 붙은 줄기들도 마치 잘라 낸 자리에서 다시 자란 줄기들처럼 한 뿌리에서 나온 것 같다. 하지만 가을이 되면 이들 삼형제의 협동심에 살짝 금이 간다. 오른쪽 참나무는 이미 물이 들었는데 중간 것과 왼쪽 것은 아직 짙푸른 초록이다. 그로부터 2주쯤 지나야 중간 것과 왼쪽 것도 겨울잠에 들어간다. 서 있는 장소가 같은데 왜 이 셋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일까? 나무가 언제 잎을 버리느냐는 실제 성격에 좌우된다. (p. 193)
나무들에게도 성격이 있다니, 식물들에게 좋은 음악과 이야기를 들려주면 잘 자란다는 연구를 전해 들었을 때보다도 크게 놀랐다. 나무들이 생명체라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개체마다 다른 판단 기준을 지니고 있을 줄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나무는 뇌도 없고, 무언가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보일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인간 위주의 사고방식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생명체가 무엇을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데에 꼭 뇌가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우리의 과학과 능력으로는 알지 못하는 또다른 미지의 '뇌'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넉넉하거나 또는 게으르거나 해서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는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내 화분들을 달리 보게 됐는데, 화분 하나하나가 다른 개체라고 본다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내게 말을 걸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책 속에서 식물 개체마다 다르게 의인화하여 표시하던 성격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무척 신났다. 식물들이 그저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만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 단지 말이 통하지 않을 뿐인 '외계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니까.
미모사는 물체가 닿으면 깃 모양의 잎을 접는다. 한 실험에서 미모사의 잎에 규칙적으로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처음에는 놀란 미모사가 짜증을 내며 얼른 잎을 오므렸지만,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물방울이 아무 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로는 물방울이 떨어져도 잎을 오므리지 않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테스트를 중지한 지 몇 주가 지나도 미모사가 그 교훈을 잊지 않고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p. 70)
'파블로프의 개' 실험을 통해 사람들은 동물들이 어느 정도의 학습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안다. 그래서 무언가를 피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원하기도 한다. 이미 경험해본 바로 전자가 자신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고, 후자가 좋은 것을 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식물들에게도 학습 능력이 있다고 못박고 있다. 기나긴 경험을 통해 DNA가 바뀌는 식의 변화가 아닌 한 개체의 짧은 생애 동안 일어나는 변화, 즉 학습을 통한 변화이다. 예전에 미모사를 키워본 적이 있다. 잎에 손을 댈 때마다 움츠러드는 것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런 짓을 몇 날 며칠 계속해서 했다면 그 미모사도 마침내는 잎을 움직이는 행동을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미모사가 계속 잎을 움츠리는 것이 피곤하겠다며 한참 괴롭히다가 멈췄었는데, 학습을 통해 움츠리는 것을 멈출 수도 있으리라곤 차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DNA에 새겨진 대로 움직일 뿐인 기계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정말 짜증을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어린 나무들은 한시바삐 자리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 마음만 먹으면 한 철에 0.5미터는 거뜬히 자랄 수 있다. 하지만 엄마가 반대한다. 엄마가 거대한 수관으로 어린 자식들을 뒤덮고, 다른 어른 나무들과 힘을 합하여 숲 전체에 두꺼운 지붕을 씌운다. 그 결과 숲의 바닥이나 아기 나무들의 잎까지 당도할 수 있는 햇빛의 비율은 겨우 3퍼센트밖에 안 된다. 3퍼센트면 하나도 안 비쳐 든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그 정도면 겨우 죽지 않고 목숨만 부지할 정도의 광합성밖에는 할 수가 없다. 적절한 성장은 말할 나위도 없고 나무 몸통을 튼실하게 키울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런 엄하디엄한 교육에도 저항은 꿈도 꿀 수 없다. 저항을 하려고 해도 에너지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중략) 이 아기들이 기를 활짝 펴고 마음껏 성장할 수 있으려면 아마 아직도 200년은 더 목숨을 부지하며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물론 기다림의 시간이 혹독한 것은 아니다. 엄마가 뿌리를 통해 아기에게 손을 뻗어 당과 다른 영양소를 공급해 준다. 아기 나무들에게 엄마가 젖을 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 50)
물이 많은 땅에서 자란 가문비나무는 철이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나무로부터 불과 1킬로미터 떨어진 곳은 돌투성이의 메마른 산비탈이다. 여름에 가뭄이 심하면 그곳에 사는 나무들이 큰 해를 입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그곳에서 인내하며 살아온 금욕주의자 나무들이 철없이 편히 산 친구들보다 훨씬 더 가뭄을 잘 견딘다. 비탈에선 흙이 저장할 수 있는 수분의 양이 적고 햇살도 더 따갑게 내리쬐지만 거의 1년 내내 물 없이 버틴 비탈의 가문비나무는 씩씩하게 잘 살아남는다. 물론 성장 속도는 눈에 띌 만큼 느리지만 얼마 안 되는 물을 아주 효율적으로 분배하여 혹독한 가뭄도 잘 견뎌 낸다. (p. 66)
엄마 나무들은 어린 나무들이 제 몸통을 보다 치밀하게 키워낼 수 있도록 너무 헤픈 환경을 마련해 주지 않는다. 위 두 번째 인용에서 물 많은 땅의 가문비나무는 아마도 엄마나무가 없었거나 엄마나무조차 물 많은 환경에 적응해 물을 그야말로 물 쓰듯 펑펑 써댔을 것이다. 이는 나무들에게도 환경과 학습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주어지는 햇빛과 물이 원체 적어서 이를 절약하며 산 나무들과 넘쳐나는 햇빛과 물을 마구 써대며 사는 나무들은 똑같은 고난─그들에겐 아마도 기존보다 줄어든 햇빛과 물일 것인데─을 맞아 다른 결과를 낸다. 하나는 계속 잘 살아가고 하나는 말라 죽어 버린다. 이런 모습들이 인간이 제 자식들을 어떻게 키우는지와 비교되어 무척 흥미로웠다. 너무 풍족한 환경과 부모의 엉성한 교육 밑에서 제멋대로 자란 아이와 부모의 올곧은 가르침과 절제 아래 자란 아이가 훗날 어떤 결과를 내게 되는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나무들과 인간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엇비슷한 면이 있을 줄이야! 놀랍다.
재미나고 흥미로운 정보를 표시하느라 빼곡히 붙은 플래그잇
그렇다면 왜 나무들은 그런 사회적 존재가 되었을까? 왜 자신의 영양분을 다른 동료들과, 나아가 적이 될 수도 있는 다른 개체들과 나누는 것일까? 이유는 인간 사회와 똑같다. 함께하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는 숲이 아니기에 그 지역만의 일정한 기후를 조성할 수 없고 비와 바람에 대책 없이 휘둘려야 한다. 하지만 함께하면 많은 나무가 모여 생태계를 형성할 수 있고 더위와 추위를 막으며 상당량의 물을 저장할 수 있고 습기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 환경이 유지되어야 나무들이 안전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다. 그런데 그러자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공동체를 유지해야 한다. 모든 개체가 자신만 생각한다면 고목이 될 때까지 수명을 유지할 수 있는 나무가 몇 그루 안 될 것이다. (p. 14)
숲에는 나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잡목도 있고 풀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식물 종들이 그런 식의 상호 교류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들판으로만 나가면 식물들이 정말로 과묵해진다. 경작 식물들은 인간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런 식의 상호 협력 능력을 대부분 상실한다. 그래서 귀도 먹고 입도 막히고, 그로 인해 곤충의 쉬운 먹잇감이 된다. 현대 농업이 과도한 농약을 필요로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의 농업도 숲을 들여다보고 배워 밀과 감자에게 수다의 즐거움을 돌려줄 수 있다면 아마 들판도, 우리의 식탁도 훨씬 풍요롭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p. 25)
목걸이의 강도는 제일 약한 고리의 튼튼함에 달려 있다. 옛날 수공업자들 사이에서 떠돌던 이 속담은 어쩌면 나무가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나무들은 조건 없이 서로를 돕는 것이다. (p. 34)
식물들이 인간 사회와 비슷한 면모를 보이는 점은 또 있다. 서로 함께 하여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다. 애초 인간들이 사회를 이뤄 살기 시작한 것과 비슷한 이유이다. 지금도 인간은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으나 사회를 이룬 목적은 점점 잊어가고 있다. 인간들이 서로를 보살피고 돌보는 일이다. 오히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느라 바빠서 남의 이익은 무시하고 해코지하고 괴롭히는 일이 더 많다. 단기간 자신의 배를 채우고 흡족할 수는 있으나 그런 식으로 고루 분배되지 않은 이익이 과연 사회 전체적으로 좋은 일이 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전히 함께 인내하며 서로를 돌보는 식물들에게서 초심을 잃어가는 인간들이 배울 점이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이란 종은 도구를 이용할 줄만 알았지 동물이나 식물들보다도 뒤떨어지는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균류는 자신이 뒤덮어 버린 뿌리 끝을 조종하기 시작한다. 일단은 나무가 지하에서 잔뿌리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나무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유익하면 세포의 성장을 조절하는 식물 호르몬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뿐 아니다. 균류는 넉넉한 사용료의 대가로 몇 가지 유익한 활동을 추가한다. 그중 한 가지가 중금속 여과 기능이다. 중금속은 나무뿌리에게는 해가 되지만 균류에게는 별 해를 입히지 않는다. 이렇게 걸러 낸 유해 물질은 가을이 되어 우리가 길에서 따서 집으로 가져가는 포르치니 버섯이나 그물버섯의 몸속에 고이 저장된다. 1986년 체르노빌에서 방사능이 유출된 후 그곳에서 자란 버섯에서 주로 방사능 세슘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p. 75)
고향이 아닌 곳으로 끌려온 침엽수들은 심각한 문제를 겪는다. 억지로 끌려온 곳이 대부분 저지인데, 침엽수가 살기엔 너무 건조하고 너무 덥다. 따라서 그런 침엽수림의 공기엔 먼지가 많다. 여름에 그런 숲에 들어가면 역광에 비친 먼지들이 풀풀 날아다닌다. 이렇듯 목이 말라 허덕이는 침엽수들을 나무좀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급해진 나무들이 허겁지겁 향기 물질을 내뿜는다.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화학적 방어 물질을 뿜어내는 것이다. 숲에 들어간 당신은 숨을 쉴 때마다 그 모든 것을 폐로 들이마신다. (중략) 침엽수림을 찾은 사람들은 혈압이 올라가지만 참나무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혈압이 안정적으로 떨어진다. (p. 274)
인간들이 저지른 짓의 결과는 나무를 비롯한 식물들이 1차적으로 받아들이고, 결국에는 인간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 일본대지진 이후 동아시아 지역의 몇몇 종류 버섯에서 세슘이 검출되었고, 지금도 검출되고 있다. 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 버섯들이 방사능을 그토록 잘 흡착하는지 몰랐었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원전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재앙이다. 이 재앙이 일으킨 피해는 동식물에게서 다시금 인간에게로 돌아온다.
본래 그 자리에 존재했던 자연림을 훼손하고 인공적으로 조성한 삼림 역시 피해를 끼치게 됨을 알려 준다. 끔찍한 장소에서 내내 갇히고 학대받은 동물들의 알이나 고기가 우리의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은 이제 천천히 알려지고 있는 사실이다. 동물들이 그렇다면 식물들도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실제로 자신에게 알맞지 않은 환경에 심겨진 식물들이 고통스러워 한다는 연구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고통에 찬 생명체가 내뿜는 에너지가 과연 우리에게 이득이 될 것인지는 굳이 어렵게 따져보지 않아도 너무나 빤하다.
저자는 다른 페이지에서, 도심의 거리에 있는 가로수들은 같은 나무들과 연대함으로써 받는 도움을 얻지 못하는 '거리의 아이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땅 밑은 여기저기 막혀서 뻗어나갈 수 없고, 그러다 보니 버티는 힘이 부족하게 되어 쓰러지게 되고, 대기는 건조하고 매연이 사방을 휘감고 있다. 밤에도 계속되는 광공해는 나무들의 휴식을 방해한다. 거리의 나무들은 그들이 버틸 수 있는 동안은 버텨내지만 이는 행복한 성장도 건강한 연대도 없는, 죽지 못해 사는 삶이다.
정말이지 책 전체에 걸쳐 신기하고 낯선 정보들이 수두룩하다. 내가 생각했던 '식물인간' 이미지의 식물과 나무들에 대한 편견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게 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느리고 조용히 일어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느리거나 조용하지 않은 사건들이다. 그저 평화롭기만 한 듯한 숲의 생태계에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격렬한 투쟁이 있고, 친구들 간의 연대가 있다. 무조건 개발, 개발만을 외치는 우리나라에 정말 필요한 시각과 자세가 아닌가 싶다.
나에겐 정말이지 황홀하고 새로운 비밀들이 화려한 빛깔의 폭죽처럼 펑펑펑 터지는 잔치 같은 책, 읽으면서 행복한 책이었다. 흑흑, 이런 책 또 어디 없나?
참, 이 새로운 정보의 물결 가운데 '인생 한 방!'이나 '아야, 아야' 같은 저자의 귀엽고 재미난 말투에 어쩐지 부드러운 엄마 미소가 지어진다. 미모사에겐 미안하지만 미모사의 짜증도 귀엽기 그지없다. 누구에게라도 추천하고픈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