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편지 쓰기는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그 당시엔 삐삐나 사서함 서비스 등도 있었지만 편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대화 창구였다. 예쁜 알록달록한 편지지에 어떤 색상의 어떤 펜으로 쓸지 결정하고, 편지와 함께 무엇을 동봉하면 좋을지도 고민했더랬다. 이후 편지는 이메일로 바뀌었고, 한동안 친구들은 이메일로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메일의 시대도 져버리고, 인스턴트 메시지의 시대가 왔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점 더 짧아져 메신저 대화창의 숫자 1이 사라지는 순간조차 길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글쎄,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누군가 보낸 메시지가 바로 눈 앞에 떠올라서 숫자 1이 사라지길 기다리는 시간조차 없어지는 게 아닐까? 기다림의 미학이란 말이 사어가 되어가는 것이 발전의 또 다른 모습인가 보다.
편지를 쓰지도 않고, 막상 쓰라고 하면 귀찮아할 거면서 <디어 존, 디어 폴>의 두 주인공 존 M. 쿠체와 폴 오스터의 편지 대화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타자기로 쳐서 편지로 부치거나 팩스로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도 그렇거니와 두 사람이 편지 속에서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특히 더욱 부러웠다. 우정과 사랑, 경제와 철학, 스포츠와 문학, 정치와 역사 등등 두 사람의 편지 대화는 정말 그야말로 다방면에 걸쳐서 이뤄진다. 요즘 세상에 이처럼 난해한(?) 주제들로 대화를 나눌 사람을 찾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고민의 레벨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마스다 미리' 시리즈가 인기 있는 이유는 어디다 말 못 할 사소한 생각들을 지면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누군가와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은 만화를 보고 공감했다. 그런데 존 쿠체와 폴 오스터는 자신의 그 생각들을 작품 속에 털어놓는 한편 정리되지 못한 것들은 편지로 다시금 나누고 있으니 머릿속에 어떤 찌꺼기도 남지 않아 깨끗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든 그 새로운, 더 낮은 숫자가 뜻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일까요? 답은 이렇습니다. 또 다른 숫자들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문제의 숫자들은 다른 숫자들을 나타내고, 그 다른 숫자들은 또 다른 숫자들을 나타내는 식입니다. 이러한 기표들의 집합의 회귀가 어디에서 끝날까요? 메뚜기 떼의 창궐이라던가 외적의 침략처럼 그것들이 의미하는 실체는 어디에 있을까요? 어디에도 보이질 않습니다. 세상은 이전 모습 그대로입니다. 숫자들 말고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숫자들이 어떤 현실도 반영하지 않고 반대로 그저 다른 숫자를 나타낼 뿐이라면, 묻겟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이제 우리가 더 가난해졌고, 더 가난해진 것처럼 굴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특정 숫자,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면서 정작 현실은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숫자의 집합들은 그냥 치워 버리고 우리 자신을 위한 새로운 숫자, 어쩌면 우리를 예전보다 더 부자로 보여 줄 숫자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꽉꽉 들어찬 식품 저장실과 단단히 조인 지붕, 내륙 지역의 잘 돌아가는 공장과 농장들이 있는 우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숫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요. (p. 32)
세계 경제가 또 한 번 위태로웠던 2008년, 두 사람의 대화는 숫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IMF때도 그랬지만 경제 위기는 보이지 않는 숫자들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 했다. 사람들은 직업을 잃고, 집을 잃고 가족도 잃다가 마침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대해 존 쿠체는 지금의 '나쁜 숫자' 대신 '좋은 숫자'로 경제를 대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동화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며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폴 오스터는 돈이란 무가치한 종잇조각에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기로 하여 생겨난 것이며, 숫자들이 '순수한 관념의 영역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었다고 답한다. '숫자들이 우리를 겁주기 시작한 시대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 숫자들이 '플라톤의 동굴' 속 그림자와 같다는 데 의견을 모은다. 막연히 나와 상관없는 숫자라고만 생각하며 경제 관리에 무능한 정부를 탓하기만 했는데, 이들의 관념론적인 경제적 숫자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니 우리가 참으로 이상한 시절로 진입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식 그래프의 보이지 않는 숫자와 거기서 이득을 얻는 치들도 그렇지만, 인공지능 로봇의 출현이나 유전자 복제 등 윤리적인 문제가 수북한 요즘이다. 마치 역사가 한 바퀴 빙 돌아서 먼 옛날 철학의 시대와 맞닿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두고 두 작가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궁금해졌다.
서간문은 일기만큼이나 사적인 것이라 이 책을 읽고 있자니 어쩐지 두 사람 사이의 편지 대화에 끼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제3의 대화자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두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다를 때, 그리고 결론도 나지 않았는데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논쟁을 마무리 지을 때는 더욱 끼어들고 싶어졌다. 존 쿠체 편지에서 그가 얼마간 신경질적이며 집착적이고, 잘난 척하는 경향이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85페이지에서 존 쿠체는 이렇게 적는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의 미개한 변방들(이슬람 세계의 가장 두드러지게 미개한 변방)에서 불륜을 저지른 커플이 처벌을 받을 때, 우리는 인권을 무시한다며 그들을 처벌하는 법을 비난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금기를 깨는 것이 <권리>가 되었으니 대체 무슨 놈의 세상이 그럴까요? 금기를 위반해도 괜찮다면 금기를 두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선 이슬람 세계의 얼토당토않은 관습은 나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많으나 그들을 '미개하다'고 표현하는 데에는 반발심이 들었다. 요즘에도 다른 문화권을 가리켜 미개하다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그것도 작가가!) 있을 줄이야. 그리고 불륜을 저질러 처벌하는 것에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불륜의 대가가 돌에 맞아 죽는 것 같은 끔찍한 것이기에 비난하는 것이라고 토를 달고 싶어졌다. 불륜을 저지른 커플이 처벌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들을 왜 미개하다고 하는 건지, 그냥 그 지역 자체가 개발이 덜된 것을 가리킨 것은 아닌지 의문이었다. 이에 대해 폴 오스터는 뭐라고 할는지 궁금했는데 그저 이 문제가 거론되었던 원인이 된 근친상간에 대해서만 이야기할뿐 언급이 없어 아쉬웠다. 뭐, 때로는 어떤 문제는 그저 모른 척하고 넘어가야 할 때도 있긴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여러 가지 돈키호테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만, 마지막으로 생각해 낸 것이 제일 낫다고 믿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국민을 소개시키고 그들에게 와이오밍 주를 주는 겁니다. 와이오밍은 넓고 인구는 적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하여 미국 정부가 그곳의 목장과 농장들을 사들여서 와이오밍 인구를 그 지역의 다른 주들로 재배치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 안 됩니까? 인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사라질 것이고 딕 체니는 홈리스가 될 테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번성하는 국가를 세울 텐데요. 제가 보기에는 완벽하게 합리적인 해결책입니다만 물론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겟지요. 어째서일까요?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편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p. 191)
패배라는 것은 그런 것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패배해 왔습니다. 운명이 아무리 쓰라릴지라도 그들은 맛보아야만 하고, 그것을 참된 이름으로 부르고, 삼켜야만 합니다. 패배를 받아들이되 건설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반대로, 건설적이지 않은 방법은 내일은 뭔가 기적이 일어나 모든 잘못된 것들이 바로잡히게 되리라는 보복주의자들의 꿈을 계속 키워 주는 것입니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건설적인 방법에 관해서라면 독일의 1945년 이후를 보면 될 것입니다.(p. 197)
두 사람은 늘 반복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경제면에서 존 쿠체가 '나쁜 숫자'들을 '좋은 숫자'들로 대체하는 상상을 했듯이 폴 오스터는 미국 내의 남는 땅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한다. 두 문제 모두 기존 권력(땅이든 돈이든)을 가진 자들이, 세상이 계속 좋지 않은 쪽으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권력을 내놓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봉착된다. 물론 이뤄질 수 없는 꿈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참 소설가다운 이상적인 생각이 아닌가 싶어 쓴웃음이 났다. 그들의 상상처럼 세상 만사가 순조롭게 풀려간다면 좋으련만, 역시 그들이 내린 결론처럼 사람들은 훌륭하고 선한 결과를 낼 혼돈보다는 부패하고 타락한 기존 질서 쪽에 서는 것을 더 좋아하는 법이다.
존 쿠체가 썼듯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계속해온 패배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므로, 이제는 더 건설적인 방법으로 접근해 가야 하리라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결국 모든 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그들이 맞닥뜨리는 시련은 시련 그 자체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에 넘어갈 수 있는 방도가 생기는 법이다. 이스라엘은, 글쎄, 정말 그들이 믿는 신이 있다면 이 세상에 강림했을 때 제일 먼저 그들을 벌할 것 같다.
존 쿠체는 1940년생으로 이제 여든을 바라보고 있고, 폴 오스터는 이제 칠순이 되었다. 존 쿠체는 2011년 3월 7일자 편지에서 기력이 쇠해가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작가로서 훌륭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 고민을 털어놓는다. 4월 18일자 편지에서도 세상을 떠나간 이후의 일에 대해 언급한다. 나이가 듦에 대해 노인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특히 이뤄놓은 것들이 많은 이들이 어떤 식으로 초조하게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지 보이는 듯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것처럼 불행한 것은 아닐 테지만, 자신의 이름이 걸린 것들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도 엿보인다. 존 쿠체의 고민처럼 어떻게 하면 대망의 피날레를 찍을 수 있을는지 그것도 어려운 문제이긴 하겠다.
<디어 존, 디어 폴>은 정말 다양한 방면의 이야기가 오가는 작가들의 대화로, 그들로선 우정을 나누는 것이 동기였겠지만, 그런 대화를 통해 새로운 발상에 자극을 받고 더 나은 작품을 쓰는 데에 도움을 얻었을 것 같다. 그리고 독자들로선 그들의 대화를 함께 나눌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어 좋은 책이다. 특히 두 작가의 팬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팬이 아니더라도 작가들의 사고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어떻게 합의점을 찾는지 알 수 있어 좋고, 의외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