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의 소설은 너무나 평면적인 인물들 때문에 내 입맛에는 영 맞지가 않다.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읽으며 얼마나 몸을 비비 꼬았던가! 멍청한 것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순해빠진 인물들이 답답해서 차라리 악인의 편을 들고 싶기까지 했다. "퀼프!! 저 인간을 열받게 만들어! 악에 받쳐서 화내고 저항하도록 만들어!!!!" 끙~
하지만 찰스 디킨스 소설은 19세기 산업화 시대의 사회와 자연, 그 속 인간들의 모습을 직시하고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는 스모그와 환경오염으로 찌든 도시가 다시 자연의 빛을 되찾게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망가진 자연환경보다 그를 더 안타깝게 한 것은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최소한의 것조차 여유롭게 갖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본질적인 가난에 발목이 잡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소설 속에 이 불쌍한 사람들을 연민의 감정으로 채색해 담고 이들이 겪는 비참함을 그려내는 것으로 사회의 참상을 적극 고발했다.
소설가는 사회의 부조리와 거기서 비롯된 모순과 병폐를 이야기에 담아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겉으로 드러난 것을 의심하고 고뇌하는 눈을 갖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점에서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그 의무를 누구보다도 충실히 이행한 소설가였다. 게다가 그는 소설가로서뿐만이 아니라 빈민들의 참상을 지적하는 저널리스트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 책에는 그가 여러 잡지나 신문 등에 실은 에세이, 또는 칼럼이 여덟 편 실려있다. 때로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감탄케 하고, 때로는 웃게 하고, 또 때로는 비꼬아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그의 재능이 소설만이 아니라 칼럼에서도, 아니 칼럼에서 더욱 빛을 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길을 잃은 아이가 느꼈던 비이성적인 공포가 지금도 그때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가 그때 차라리 사자가 지배하는 비좁고 번잡하고 불편한 거리가 아닌 북극에서 길을 잃었다면, 그 정도로 겁에 질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 한동안 울고불고하며 거리를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러다 엉망이 된 자존심으로 어느 건물 앞마당에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계단에 걸터앉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갸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p. 31)
두 번째로 실린 단편 <길을 잃다>는 그가 어린 시절 런던 시내에서 길을 잃고 헤맸던 일화를 들려준다. 똘똘하고 상상력 충만한 어린아이가 혼란스러운 도심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서도 결국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이 어린 신사가 어찌나 귀엽던지 우리집 앞이었다면 현관문을 열어주었을지도 모른다. 이 총명한 소년은 잠시동안은 어린이의 입장에서 울고불고 하지만, 곧 그것을 멈추고 앞으로 살아갈 방도까지 궁리한다. 문득 나 어렸을 때가 떠오른다. 이모들이며 가족들을 따라간 단풍철의 내장산에서 길을 잃고 나 역시 울고불고 하면서 이 길 저 길을 오갔더랬다. 앞뒤로 오가던 어른들이 다들 '길을 잃었냐'며 걱정스레 물어오시고, 난 대답도 없이 그냥 무턱대고 길을 따라 걸으면서 펑펑 울었다. 지금 생각하기로는 아마도 '그렇다'고 대답하면 정말 가족들과 완전히 헤어지게 된 것으로 확정될까봐 대답을 꺼렸던 듯하다. 그때 느꼈던 공포란, 저자가 표현한 '길을 잃은 아이가 느꼈던 비이성적인 공포' 그대로였다. 정말 만감이 교차했는데, '난 이제 어떻게 되는가'가 가장 무서운 문제였던 것 같다. 난 울고불고 하다가 운 좋게 가족들을 만나 더 이상 그 문제에 고심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여덟아홉 살의 찰스 디킨스는 미래를 내다본다. 그리고 적당하다고 생각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길을 떠난다.
나는 그 개를 보는 순간 휘팅턴이 떠올랐고, 뭔가 일이 슬슬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녀석이 이제부터 영원히 나의 개가 되어 내가 성공하는 데 발판이 되어주리라 상상하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이일로 크게 위안을 받은 나는 저녁을 먹으려고 주머니에서 작은 독일 소시지를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가 마음을 바꿔 개에게 던져주었다. 개는 냉큼 달려와 소시지 조각을 물고 한쪽 옆으로 달려가더니 알약이나 되는 듯 꿀꺽 삼켰다. 내가 소시지를 우물우물 씹고 있는 동안 녀석은 더 주지 않으려나 기대하듯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개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궁리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메리찬스라는 이름이 알맞을 것 같았다. (......) 그때 메리찬스가 나를 향해 맹렬히 짖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끄럽지도 않은지 궁금했지만, 녀석은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하게 짖어댔다. (......) 그러다 급기야 내 작은 독일소시지를 향해 달려 들더니 손에서 낚아채어 멀리 달아나버렸다. 녀석은 결코 내 성공에 도움을 주러 돌아오지 않았고, 그때 이후로 마흔이 된 지금까지 나는 충성스러운 메리찬스를 다시 보지 못했다. (p. 37)
어린이다운 순진한 모습이 엿보여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짓게 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마흔의 나이에 이토록 유쾌한 어조로 에피소드를 정리하는 찰스 디킨스라니! 그의 명랑함에 키득키득 웃게 되어 정말이지 무척이나 즐거웠다. 극장에 간 어린 찰스 디킨스는 관객들을 추첨하여 당나귀를 준다는 이야기에 발표가 있기 전까지 온갖 상상을 다하고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상태에 빠져 있느라 정작 극은 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그러다 다른 사람이 당첨되자 오히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관람을 한다. 하하하~ 어쩐지 그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다. 그야말로 어린이다운 순수한 기대감과 미래에 대한 낙관이 뒤섞인 모습인지, 이 책이 찰스 디킨스의 어린 시절 이야기만 잔뜩 담아놓았길 바라기까지 했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가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럽고 유쾌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 다시 읽어도 사랑스럽다~~)
이 연맹에 속하는 어떤 가난한 교구는 수입 1파운드당 5실링 6펜스까지 세금을 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시기에 하노버 스퀘어의 부유한 세인트조지 교구는 1파운드에 약 7펜스, 패딩턴은 약 4펜스, 웨스트민스터의 세인트제임스는 약 10펜스의 구빈세를 냈다! 지금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균등하게 구빈세를 부담하는 방법밖에 없다. (중략) 아울러 그들 또한 솔로몬의 재판석에 앉기 전에 아침마다 템플 주변의 상점과 주택가를 돌아보며 우선 '어떻게 하면 이 빈민들이─물론 많은 빈민이 노역소 밖에서 스스로 생계를 영위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만─ 조금이라도 더 스스로를 책임지게 할 것인가?' 자문해봐야 한다. (p. 92)
"이게 모두 납 중독 때문이에요. 그렇게 밤낮없이 일하더니, 에고, 불쌍한 여편네 같으니. 통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몰라요. 그나저나 제 남편은 막노동을 하는데, 요 며칠 나흘 동안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녔는데 아직이에요. 지금도 돌아다니고 있죠. 일할 준비는 되어 있는데, 일거리가 없어요. 이제는 장작도 없고, 먹을 것도 냄비에 있는 저것뿐이에요. 이 주일 동안 십 실링도 안 되는 돈으로 버텼죠. 오, 하느님, 저희를 굽어 살피소서! 아이고, 박복한 우리네 팔자, 정말로 앞날이 캄캄해요." (p. 102)
몇몇 단편들에서 저자는 궁핍한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며 그 실태와 개선점 등을 찾아보는 등 고발자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문제에 대한 그의 해결 방식이 지금에 이르러선 완전히 옳다고는 할 수 없으나 최소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만하다. 아마도 시간이 충분했다면 19세기에 이미 빈민 노동자들의 삶은 대폭 개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고 허버트 스펜서가 이를 자기 멋대로 해석, 경제 분야에 억지로 끼워 맞춤으로서 빈민들은 구제할 가치가 없으며 사라져야 할 약자로 취급된다. 소설 및 언론을 통해 그토록 간절히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려 했던 찰스 디킨스의 노력과 활동은 그 빛을 바랜다. 점점 더 암울한 처지로 전락하는 빈민들을 보며 찰스 디킨스가 얼마나 안타까워 했을지, 지금 내 마음이 다 안타깝다. 두산백과 찰스 디킨스 항목에 이르기를 "개인의 힘으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사회의 벽에 직면하여, 그의 자랑거리인 유머도 그 빛을 잃고 무력감과 좌절감이 전편(全篇)을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문득 비바람을 견디며 몇 겁의 세월이 흐른 후 지질학자에 의해 절벽 표면에서 발견된, 멸종된 생명체의 발자국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추측을 해보았다. 만약 이 진흙밭이 지금 이대로 돌처럼 굳어져서 수만 년 동안 여기에 가려진 채 있게 된다면, 지구상에서 우리의 후세가 될 인간 종족은 전통의 도움 없이 이곳에서 찾아낸 흔적만 가지고 인간의 지력을 최대한 발휘해, 한 나라의 수도에서 아이들을 방치할 뿐만 아니라 바다와 육지에서 휘두르는 힘은 자랑스러워하면서 그 힘으로 아이들을 붙들어주고 구해주지는 않는 공공의 야만성을 가진 문명사회가 존재했다는 놀라운 추론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점이 궁금했다. (p. 124)
우리가 미래의 희망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제대로 대우하지는 않는 아이들에 대한 태도는 19세기와 큰 차이가 없다. 여전히 아이들은 안전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고 가장 우선적인 고려 대상이 되고 있지도 않다. 19세기에 찰스 디킨스가 했던 것처럼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인간이라는 종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경제 과학적인 발전이 취우선이 아님을, 그것들은 모두 인간을 위한 토대에 불과한 것임을 선조들이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고 조롱하거나 원통해하지 않을까? 하지만 깨어 있는 자들이 아무리 주변을 돌아보라고 설파해도 쇠귀에 경 읽기로 그칠 것이다. 인류의 전체적인 성숙도는 높아졌을 망정 그래도 듣지 못하는 귀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머리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요사이 런던으로 통근하는 사람들치고, 뭔가 척추 질환 때문에 몸이 둘로 접힐 듯 구부러진 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쪽 옆으로 돌아가 있던 고개가 이제는 팔 뒤로 내려가다 못해 손목에 닿을락 말락 하는 여인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그녀의 지팡이와 숄, 바구니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녀는 길바닥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기에 손으로 더듬어 길을 걸어가고, 구걸도 하지 않으며, 걸음을 멈추는 법도 없다. (중략) 우스꽝스럽게 생긴 꼬리에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잡종견이 꼬리를 바짝 세우고 귀를 쫑긋 세운 채 느릿느릿 걸어가다 자기 동료─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인 인간의 행동에 우호적인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개는 푸줏간에서 잠깐 걸음을 멈춘 다음 돼지고기의 여러 가지 좋은 점에 대해 생각하는 듯 헤벌쭉 벌린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나처럼 동쪽으로 달려가다, 잔뜩 웅크린 덩어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개는 그 덩어리를 보고 움찔하긴 했지만, 자체 이동수단이 있는 상황이니만큼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걸음을 멈추고 귀를 더욱 쫑긋 세운 채, 작은 움직임도 집중해 노려보면서 짧고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며 코를 반짝거렸다─내가 공포를 느낄 때와 비슷했다. 그 덩어리가 계속해서 다가오자 개는 꼬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마구 짖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했지만, 순간 그런 비행이 개한테 어울리는지 스스로 갈등하다 고개를 돌렸고, 여전히 다가오고 있는 헝겊 뭉치와 마주쳤다. 개는 한참 머뭇거리다 이내 그 넝마 뭉치 어딘가에 얼굴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필사적으로 탐색하고 조사해봐야겠다고 결심한 뒤 슬금슬금 그 덩어리에게 다가가 천천히 둘레를 돌았다. 그러다 마침내 아래쪽,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서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충격의 비명을 지르며 동인도회사의 부두로 비행하듯 달려갔다. (p. 127)
찰스 디킨스가 묘사한 개의 행동이 일순 재미있기도 하지만, 폐지 줍는 노인들이 생각나는 대목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19세기를 살던 저자가 놀라 적어둔 괴이한 모습의 노파. 불행히도 21세기의 우리나라에선 왜 그리 자주 보이는지. 100년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100년이 더 지나면 우리는 변해 있을까? 서로의 조건으로 판단하며 거부하지 않고 인간 자체만으로 평가하게 되는 날이 올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지만, 돌아보고 반성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낙숫물에 바위 뚫리듯 세상도 바뀔 것을 기대해도 될 것이다. 소설가로서의 찰스 디킨스가 아닌 언론인으로서의 찰스 디킨스를 보게 되어 무척 좋은 독서였다. 플러스 100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