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보영. 연예인에 별 관심 없는 내가 그래도 얼굴은 아는, 예쁘장한 여배우. 그런 그녀의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호기심이 생기긴 했어도 위시리스트에 올라 있는 수많은 책들을 제치고 구입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이런 독서 에세이는 소설가 같은 사람이 쓴 게 아니고선 그리 눈여겨보지 않기도 하지만, 연예인들이 자기들의 본업이 아닌 쪽에 기웃거리는 게 영 탐탁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별 능력도 없으면서 새로운 분야에 연예인으로서의 유명세를 빌어 노력없이 화제를 불러모으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보니 개중에 정말 특별한 이들까지 놓칠 우려가 있기는 하다. 이 <사랑의 시간들>은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저자는 엄격한 부모님이 정해둔 테두리 안에서 순종적인 아이로 성장하였다. 자식 잘 되라고 하는 가르침이지만 너무 강제적이거나 한쪽으로 치우친 방식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남기곤 한다. 어린 저자는 바로 그런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책을 파고들었다. 배우가 된 뒤에는 이런저런 시각으로 자신을 재단하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책을 펼쳐들었다. 책은 그녀에게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보여주고 달리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서게 도와주었다.
지금 나는 부모님에게 어떤 원망도 없다. 그런데도 문득 제제의 외로움을 뭉클하게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치유받지 못한 상처라기보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인 외로움이리라. 내 안의 외로움을 들여다보기 위해, 또 사람들의 외로움에 다가가기 위해 나는 연기를 하고 책을 읽는다. (p. 43)
어릴 적에 마음껏 누리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나 역시 가슴에 앙금으로 남았다. 물론 이제와서는 그것으로 부모님을 야속해하거나 원망하지는 않는다. 부모님도 부모 역할에선 초보였고,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무엇보다 빈곤에서 벗어나려 애쓰느라 어린애의 욕심에 부응하기 어려웠을 뿐임을 안다. 다만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고 숨죽여 울음을 터뜨리던 그 무렵의 내가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플 뿐이다. 그래서 어린시절의 아픔을 끊임없이 보듬으려 하는 저자의 문장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미 오래된 일들인데도 떠올릴 때면 마음이 짠하다. 저자가, 그리고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아마도 이 상처들을 책 속 주인공들처럼 강건하게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E. 브라우닝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비록 그 빛은 안 보이지만 존재의 끝과 영원한 영광에
내 영혼 이를 수 있는
그 도달할 수 있는 곳까지 사랑합니다.
태양 밑에서나 또는 촛불 아래서나
나날의 얇은 경계까지도 사랑합니다.
권리를 주장하듯 자유롭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칭찬에서 돌아서듯 수수하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옛 슬픔에 쏟았던 정열로써 사랑하고
내 어릴 적 믿음으로 사랑합니다.
세상 떠난 성인들과 더불어 사랑하고,
잃은 줄만 여겼던 사랑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한평생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써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의 부름 받더라도 죽어서 더욱 사랑하리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이 시가 한때 내 마음을 얼마나 설레게 했는지 모른다. 이처럼 한계 없는 사랑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몄고,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시어 때문에 두근거렸다. 저자 역시 이런 가슴 설렘을 느꼈던지 이 시의 다른 번역 버전을 책에 실어놓았다. 번역이 살짝 다르긴 하지만 나는 이 번역(책에 실린 시와는 다른 번역이다)의 이 시를 좋아한다. 저자가 경험한 사랑이 시트콤이었듯 내가 경험했던 사랑들도 이 시처럼 치명적으로 불타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자질구레하고 때로는 유치했고 때로는 지루하기도 했다. 결혼 반대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 외로 무난히 그 관문을 통과도 했다. 이런 애끓는 사랑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소박한 사랑에 감사하고 또 무난한 과정에도 감사하다. 나 역시 저자가 말하듯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처럼 멋있게 표현할 능력은 없지만 내 나름의 방식대로 삶 속에서 잔잔하고 따뜻한 멜로를 그려나가고 있다.'
저자 이보영의 생각에 참 여러 모로 공감이 많이 갔다. 이런 책을 읽으면 이런 생각을 하고 저런 생각도 해보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이 그녀가 깊은 생각을 가진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그녀는 먼 이국 땅에서 힘겨운 삶을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의 생활상에 가슴 아파하고 그 아픔을 밑바탕으로 도움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평소 이런 인류애 활동에 관심이 많아서 더욱 반가웠다. 따뜻한 마음을 갖고 생각이 깊은 사람을 발견하면 어쩐지 기쁘다. 온통 어둡기만 한 것 같은 세상 한 귀퉁이에 또다른 불빛이 있구나, 싶어 마음이 포근하다.
책을 다 읽고 '이보영'을 검색해본 뒤 더 친근감이 생겼다. 저자의 생일과 내 생일이 꼭 1년 차이이고, 결혼도 햇수로 1년 차이, 연애기간마저 같아서 내게 없는 장점을 가진 사람을 거울로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집에 TV도 없고, TV 프로그램 자체에 관심도 없으니 그녀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지는 않겠지만, 인간에 대해 통찰력 깊은 연기를 할 수 있기를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좋은 책을 더 많이 읽고 더 깊고 풍부한 가치관을 가진 좋은 사람이자 좋은 엄마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