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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브런치

[도서] 세계문학 브런치

정시몬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5점

브런치보다는 '아점'이 더 익숙하다. 그래서 브런치라고 하면 여행을 떠나 묵는 호텔에서 먹는 조식이 떠오른다. 일반 호텔의 조식이 아니라 고급 라운지의 조식이다. 거의 일반 뷔페와 비슷한데, 서비스가 무척 좋고 식자재는 싱싱하고 물론 훨씬 맛있다. 고급스러운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어 눈과 귀, 입이 다 즐겁다. 그런 까닭에 <세계문학 브런치>라는 제목에서도 풍성하고 맛있는 뷔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다행히도 내가 생각한 이미지에 꼭 들어맞는 풍성하고 맛있는 책이었다. 부제인 '원전을 곁들인 맛있는 인문학'이라는 문구가 전혀 오버스런 수식이 아니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세계문학'이란 바로 해외의 고전이다. 내게 고전은,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섣불리 손대지 못하는 책들이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크 트웨인은 고전에 대해 '고전, 사람들이 칭찬은 하면서도 읽지는 않는 책'이라고 정의를 내렸다고 한다. 이 점이 안타까웠던지 저자는 <세계문학 브런치>를 통해 독자들이 고전을 읽고 나서 칭찬할 수 있도록 그야말로 성심성의껏 돕고 있다.

사전에 따르면 고전은 '고대 그리스 혹은 로마의 저작물'이거나 '지속적인 탁월함을 가진 작품'이란다. 저자는 사전에서 제시하는 두 정의에 가장 알맞은 고전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내세운다. 제목은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겁이 나서 손대지 못했던 바로 그 작품들이다. 530여 페이지나 되는 이 책의 두꺼움과 함께 첫 챕터부터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 웬걸? 하루만에 책의 90%를 읽어버렸다. 작품에 대한 저자의 풀이는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 발췌된 인용 문단들을 읽었을 뿐인데 3천 년도 더 전인 옛날에 이런 작품이 쓰였다고 놀라는 저자에게 깊이 공감하며, 그동안 무턱대고 두려워 하던 책들을 읽고 싶어졌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전체적으로 쭉 훑어보고 나서 저자는 호메로스의 이 작품들이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까지 살펴본다. 소크라테스가 이 작품들을 검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은 꽤 충격적이었다. 젊은이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부정적인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검열을 해야 한다고 했단다. 기원전에도 작품을 검열한다는 발상이 존재하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한편 위대한 왕 알렉산드로스는 전리품으로 얻은 귀중한 장식함 속에 그 어떤 보물들도 아닌 책 <일리아스>를 담아두었다. 역사 속의 인물이 강력했을 뿐만 아니라 지혜를 아는 현명한 왕이었다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실에 기뻐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종합적으로는 그 시대의 인간들이 지금의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인간이 실은 전혀 발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졌다.

 

이렇게 삶을 영위한 시공뿐 아니라 팔자까지 대조적이었던 단테와 괴테였지만, 이들은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대표작인 『신곡』과 『파우스트』가 지닌 공통분모들 때문이다. 우선 두 작품 다 운문의 형식으로 장대한 드라마를 묘사하고 있다는 장르적 유사성이 있다. 그뿐 아니라 실존적 위기에 빠진 주인공이 그때까지의 평범한 삶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누리며 거듭 나는 기회를 얻는다는 전제도 비슷하다. 주인공 앞에 그 새로운 경험의 안내자를 자청하는 흥미로운 캐릭터가 등장하며, 종종 그 캐릭터가 주인공보다도 돋보인다는 점까지 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성과 신성, 죄와 벌, 몰락과 구원 등 작품이 다루는 테마 역시 공통점이 많다. (p. 103)

 

두 번째 챕터는 단테의 <신곡>과 괴테의 <파우스트>를 다룬다. 이 챕터를 읽은 뒤에도 두렵던 그 책들이 무척 읽고 싶어졌는데, 이러한 감상은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다, 읽어야만 한다고 하지 않는 저자의 태도 때문에 더욱 신뢰가 갔다. 그는 '『신곡』은 『지옥 편』에 이어 『연옥 편』을 거쳐 단테가 그의 구원의 여성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 오르는 『천국 편』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워낙 『지옥 편』의 악몽 같은 이미지가 강렬해서인지 그 이후로는 뭔가 김이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저자의 이런 솔직한 의견은 다른 작품을 소개할 때도 등장하는데, 셰익스피어에 다루는 곳에서는 '우리끼리 얘기지만 셰익스피어를 읽지 않아도 사는 데 무슨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전은 무조건 읽어야 한다고 압박하는 수많은 인문학 책들과 달리 이런 태도가 되려 '용기'를 주고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저자는 <파우스트>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그리 사악하게 보이지 않음을 지적하며, 신과 악마에 대해 거론하는 다른 작품들도 함께 훑는다. 소개되는 작품은 <데미안>과 <로빈슨 크루소>다. <데미안>에서 데미안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예수에게 죄사함 받은 악당과 그렇지 않은 악당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에서는 무인도인 줄 알았던 섬에서 살던 크루소가 어떤 전투에서 구해낸 종 프라이데이의 의문을 적고 있다. 신의 전지전능함을 설파하던 크루소에게 프라이데이는 신이 그토록 강하다면 왜 악마를 처치하지 않는지 질문을 던진다. (제대로 읽지도 않은 작품들인데) 너무 익히 알고 있는 장면들이, 비슷한 주제로 한군데 묶어 놓고 보니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더불어 끝없는 질문을 거쳐 점차 성숙해지는 인간의 모습이 엿보여 흥미로웠다.

  

 

샤일록  훌륭하신 나리, 지난 수요일에 저한테 침을 뱉으셨죠. 또 어떤 날에는 저를 걷어차기도 하셨고, 언젠가는 개새끼라고 부르셨죠.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한 분에게 그 많은 돈을 빌려드리라굽쇼?

 

안토니오  나는 그대를 다시 그리 부를 것이고, 다시 침을 뱉을 것이며, 다시 걷어차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나한테 돈을 빌려주려거든 친구한테 빌려주는 것처럼 하지 말게. 친구로부터 이자를 받는 우정이란 게 어디 있던가? 오히려 그대의 적에게 빌려주듯 하게. 만약 약조를 어기거든, 그대가 웃는 얼굴로 정확히 처분을 내릴 수 있게 말이지. (p. 196)

 

'고전'이라고 할 때 빼먹을 수 없는 인물은 역시 셰익스피어다. 그의 작품들은 흥미로운 스토리와 고전적인 미가 돋보이는 대사 때문에 읽고 싶으나 기나긴 시 같은 구성 때문에 어쩐지 손 대기 어렵다. 그런데 저자가 짤막하게 맛보여주는 부분을 보자니 다시 도전하고 싶어진다. 특히 읽고 싶어진 작품은 의외로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이라는 냉혹한 상인에 대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사실 샤일록이 냉혹하게 군 까닭이 그동안 안토니오가 샤일록을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라는 이유로 괴롭혔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샤일록이 안토니오의 살 덩이를 떼어내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도 어쩐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친구를 돕다가 의도치 않게 살을 내어줘야 하는 안토니오의 입장이 아니라 멸시를 당해야 했던 샤일록의 입장에서 읽는다면 더욱 흥미로운 독서가 될 듯하다.

<베니스의 상인>과 함께 눈에 들어온 것은 <말괄량이 길들이기>이다. <베니스의 상인>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핍박 받았던 인물과 상황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읽고 싶다면,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여자라는 이유로 길들여지는 대상이 되는 카테리나의 입장에서 읽고 싶어졌다. 이 작품은 예전부터도 제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손이 가지 않았는데, 중점적 인물을 정해두고 페미니즘적인 면을 생각하며 읽는다면 역시 화가 나겠지만 읽을 만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핍박 받고 여자라는 이유로 길들여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서 대문호 셰익스피어라고 해도 그 시대의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구나 싶어 속이 쓰렸다.  

 

 

줄리엣은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그것은 다른 어떤 이름이더라도 달콤한 향기가 날 것"이라며 로미오에게 이름을 포기하라고 종용한다(물론 이 장면에서 줄리엣은 로미오가 숨어서 다 듣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름이 뭐 대수인가? 로미오면 어떻고 오미로면 어떤가? 이름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줄리엣의 대사는 때로, 아니 많은 경우 형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기호학의 명제와 부딪힌다─이 대목에서도 줄리엣이 말은 화려하게 하지만 부친의 표현마따나 "14년의 세월이 흐르는 걸 아직 목격하지 못한" 풋내기 어린아이라는 것이 증명된다고 할까? (p. 230)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고전에 대한 도전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좋은 책이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작품에 대한 저자의 의견 가운데 몇 가지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 발코니에서 로미오에게 이름을 버리라며 독백을 하는 장면을 가리켜 저자는 줄리엣이 너무 어려서 이름의 가치를 몰라 그런 게 아닌가 한다. 그러고는 김춘수의 '꽃'과 함께 아서 밀러의 <시련>에서 서명을 거부하는 인물의 대사를 첨부하면서 '프록터에게는 영혼보다도 소중한 것이 이름이다'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서명을 거부한 것은 이름이 그 자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명예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떤 이에게는 명예가 죽음보다도 중요한 것이고, 다른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 죽음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줄리엣이 어려서 이름의 무게를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저자의 의견에는 공감할 수가 없었다. 13살 소녀가 아니라 33살 성인 여성이라 해도 이름을 버리고 사랑을 택할 것이라는 점은 <안나 까레니나>의 안나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서 결혼한 에마가 독서를 깊이 있게 하지 못한다는 부분을 인용하고, 이에 대해 플로베르가 주인공에게 애정이 없다고 하거나 '된장녀는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여자라는 은근한 암시까지 읽을 수 있는데, 역시 인과 관계를 중시해야 할 사실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설명은 전혀 와 닿지 않았다. 다른 부분에서는 어떤지 알 수 없으나 저자가 인용한 부분만으로는 에마는 원래 그런 사람일 뿐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에마가 그런 성격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이라고 여겨지므로 저자의 해석은 모자라거나 지나친 감이 있다.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A가 새겨진 천에서 불타는 열기가 느껴진다는 표현이 작가의 '표현상의 오버'라고 치부하는 부분도 당황스럽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잠자의 여동생은 벌레로 변해버린 오빠를 없애자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것을 악어의 눈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오빠가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그저 벌레와 함께 사는 생활이 싫어서, 또는 그간의 생활이 답답해서 울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이 만족스러우나 몇몇 부분에서는 저자의 풀이가 '오버'스럽게 느껴지거나 설득력이 떨어져 살짝 아쉬웠다. (게다가 요즘에 누가 셜록 홈스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떠올린단 말인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을 놔두고! 저자는 영드 '셜록 홈즈'를 필히 봐야겠다.)  

 

 

아시아의 황금기에

코리아는 그 등불을 나르던 나라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등불은 다시 한 번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동방에서 빛을 밝히려.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를 높이 든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깨어지지 않은 곳,

진리의 심연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부단한 노력이 완벽을 향해 팔 뻗치는 곳,

이성의 맑은 흐름이 죽은 관습의 삭막한 모래사막 속에서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아버지시여, 내 나라가 깨어나게 하소서. (p. 511)

 

  

이 책에는 내가 적은 작품들 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거론된다. 많은 작품이 등장하다보니 짤막하게 훑을 수밖에 없지만 비슷한 주제로 묶여 있어 이야기가 짧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작품을 통해 내가 몰랐던 부분들이 다뤄지게 된 것이 좋았다. 더불어 마지막 챕터에서 시에 대해 다루고 있어 더욱 즐거웠다. 요즘 T. S. 엘리엇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고 있었기에 그의 시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 있어 기쁘게 읽었다. 엘리엇 외에도 워즈워스, 바이런, 보들레르, 타고르, 프로스트 등등에 대해 다루고 있어 소설만이 아니라 시를 접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어둠에 잠겼던 우리나라를 위해 타고르가 써줬다는 '동방의 등불'이 사실은 위의 4줄이 전부이고, 그 아랫줄은 '『기탄잘리』의 제 35번째 송가를 슬쩍 이어 붙인 것'이라는 저자의 지적에는 괜히 타고르가 얄미워졌다. <기탄잘리>만큼 아름답게 써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리 봐도 그저 그런 것 같은 넉 줄이 전부라니. 일제강점기에 눈물의 시간을 보내던 민족에게 너무 야박했다. 쳇!

 

고전은 정말이지 읽어야겠다고 하면서, 칭찬은 하면서 읽지는 않는 책이다. 이는 아마도 현대 소설이 조금 더 가벼운 무게를 지니고 있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무거워 보여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원동력이 될 자극이 필요하다면 이 책은 그야말로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나는 책을 소개하는 책을 통해서는 그리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인데, 아마 나를 유혹할 만큼 매력적인 소개를 해준 책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책은 너무 재미있어 정시몬이라는 작가를 검색해 보고 그의 다른 책, <세계사 브런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 책에서 소개된 거의 모든 책들이 무척 재미있고 흥미로워 보인다. 저자의 의도대로 머잖아 고전 작품도 손에 잡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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