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멀지 않은 교외의 고급 주택가 요쿠나초 하토하 지구. 살기 좋고 안전하기로 유명한 이곳에서 일가족이 증발하듯 자취를 감춘다. 젊은 부부와 어린아이 둘이 갑자기 종적을 감춘 희대의 사건이지만 언론 보도 한 줄 없이, 사건화되지도 않은 채로 아는 사람만 아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사건이 발생한 지 19년이 지난 지금, 실종된 일가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이와타 법률사무소를 찾는다. 이와타는 실종된 모치즈키 일가의 부인 모치즈키 료코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19년 만에 갑자기 나타난 친구 딸의 존재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본인이 모치즈키 료코의 딸 모치즈키 마키라고 주장하는 여자는 어째서 가족들이 자기만 보육원에 버려둔 채 사라진 것인지 그 사정을 조사해 달라고 의뢰한다.
“이 마을에서 범죄가 일어날 리 없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연대하며 단결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아름답고 이상적이다. 목표가 무결하고 고귀할수록 공동체의 일원들은 더욱 결속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마을을 만들자’라는 목표가 있다면 함께 노력하지 않을 구성원은 없을 것이다.
하토하 지구의 주민들은 한 몸처럼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구성원 모두가 직책을 맡아 마을 일에 참여하고, 자발적으로 방범대를 조직해 치안을 유지하는 등 그들이 사는 곳을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공동의 목표를 향해 끈끈하게 연대하는 그들은 분명 이상적인 공동체의 표본이다. 그렇게 잘 굴러가는 마을인 것 같지만 바깥에서 보는 마을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다. 과하게 폐쇄적이고 지나치게 외부인을 배척한다.
하토하 지구로 이사를 온 모치즈키 일가는 그런 마을 분위기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 모치즈키 료코는 마을이 이렇게 된 계기가 과거 마을에서 발생한 어린이 유괴 살인사건이란 것을 듣고는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어느새 료코는 마을의 안녕을 방해하는 모난 정 취급을 받고 집단 린치의 대상이 된다.
방관자가 가해자가 되기까지
가족에서 떨어져 보육시설에서 자란 마키가 이와타 법률사무소의 조사원 마사키와 함께 마을에서 홀연히 사라진 가족의 진실을 추적하는 한편, 과거 유괴 살인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기모토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일가족의 실종도 인정하지 않는 마을 사람들에게 진실을 들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마키의 간절함과, 끔찍한 기억이 남아있는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는 기모토의 슬픈 사정이 기어코 만나는 지점에서 19년간 덮여있던 엄청난 비밀이 드러난다.
그 과정이 무척이나 잔혹한데, 집단에서 퇴출당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읽기 불편하다. 폭력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어떠한 가책도 짊어지지 않으려던 방관자는 어느새 어엿한 가해자로 변해 있다. 이런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비난받고, 돌려지는 상황에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 하고 외면한 나는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 그 누군가에게는 종류만 달리할 뿐 똑같은 폭력으로 느껴지진 않았을까? 애초에 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까?
‘우리’의 다른 얼굴
‘우리’라는 말은 익숙하다. 국어를 처음 배울 때 국어 교과서 1장에서 만난 것도 나, 너, 그리고 ‘우리’다. 친밀감을 표할 때도 ‘우리’, 때로는 ‘나’라는 의미로 ‘우리’라고 쓰기도 하고, 하다못해 이 나라, 그 안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에 ‘우리’를 가져다 붙인다. 여기 적고 있는 한글도 ‘우리’말이라고 하지 않나. 못해도 하루에 수십 번은 쓰고, 수백 번은 듣고 있지 않을까?
‘우리’라고 하면 나와 너다. 너와 함께 하는 내가 비로소 우리가 된다. 개인으로의 내가 아닌 친밀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써의 나를 표현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든든하고 따뜻한 기분이 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도 ‘우리’라는 말을 남발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따뜻하고 든든한 기분에 취해 ‘우리’의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잔혹해지기 쉬운 것이다.
‘우리’는 너와 나를 단단히 묶어두면서 너와 나 바깥에 있는 것들은 멀찍이 치워둔다. 나쁘지도 해롭지도 않더라도 결국에 우리는 우리로 묶여 있고 싶어서 바깥에 있는 것들을 경계하고 미워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의도, 양심도, 시비도 뒷순위가 돼버린다. 다만 우리만 있을 뿐.
방관자가 나쁜 것은 모든 가치 위에 ‘우리’를 두는 선택을 해버린 까닭이다. 방관자를 만드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다. 우리가 항상 정의로운 것이 아니고, 바깥이 무조건 나쁘지 않다는 것도 알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버리면 나 또한 우리 바깥으로 내쳐질지 모른다는 불안, 그것이 방관자를 만든다. 그렇게 ‘우리’가 모든 판단의 제일 첫 번째가 될 때, 우리에서 ‘나’는 사라지고 그저 ‘우리’만 남는다. 그것이 아름답고 이상적인 상태일까?
별난 동네에 사는 별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 사실 별난 동네는 모든 ‘우리’들의 축소판일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나’와 ‘우리’ 사이를 저울질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고, 바보 같지만, 누구나 그럴 것 같은 선택을 해버린다. 그 선택들이 모여서 이야기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우리’를 혐오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에 얽힌 나쁜 기억이 끄집어내져서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우리’여야 한다. 연대와 협동의 가치를 폄하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너무 단단하고 좁아지고 있지 않나. 우리끼리 너무 부둥켜안고 있는 나머지 우리 바깥으로는 사나운 가시를 뻗는다. 개인보다 우리일 때 더 힘을 내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지만, 그런 ‘우리’ 안에 있을 때도 ‘나’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우리’ 안에 있어도 ‘나’의 목소리는 잃어버리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