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약에 작가라면, 한번 집으면 다 읽기 전까지는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을 쓰고 싶을 것 같다. 내가 도서 편집자라면, 읽을수록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원고를 받아 보는 것이 꿈이리라. ‘책’을 창작하고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런 악마적인 매력을 가진 글에 대한 환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호러 미스터리 작가이자 미스터리와 호러 관련 도서를 다수 기획한 바 있는 편집자이기도 한 미쓰다 신조가 독자를 옭아매는 마성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아무나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읽게 되며 읽는 자의 안위는 보장 할 수 없다.
살아남으려면 방법은 단 한 가지, 책을 끝까지 읽어 내야 한다. 물론 그건 쉽지 않지만.
『작자미상 -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은 작가의 분신인 미쓰다 신조가 이야기속의 화자로 등장하는 “작가 시리즈”중 하나이다. 이 책에 해설을 덧붙인 가사이 기요시의 글에 따르면 『작자미상』은 ‘탐정소설’을 테마로 쓰인 것으로, 불가해한 듯 보이는 문제와 이에 대한 명쾌한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편의상 ‘문제편’과 ‘해설편’이라고 표현 했지만 사실은 책속의 이야기와 현실의 이야기로 완벽하게 분리된 구조여서 각각의 이야기를 따지고 보면 호러 소설이었다가 추리소설이 되기도 하고, 추리 소설인 듯 보이다가도 호러 소설이 되고 마는 묘한 구성이다.
이야기는 작중의 화자 미쓰다 신조가 우연히 발견한 헌책방에서 『미궁초자』라는 기서를 얻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마추어 작가들의 체험인지 소설인지 알 수 없는 무서운 이야기를 실은 『미궁초자』는 제본 상태도 엉망이고 모처럼 시도한 가죽장정도 완전히 실패한 볼품없는 동인지였지만, 미쓰다 신조의 친구인 아스카 신이치로는 그 책에서 기묘한 매력을 느낀다. 결국『미궁초자』를 사들인 아스카 신이치로와 미쓰다 신조는 동인지를 함께 읽어 나가며 기묘한 독서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과거 『미궁초자』를 소유했던 사람들이 돌연 자취를 감췄거나 행방불명되어 버렸다는 섬뜩한 사실도 알게 된다. 책의 주인은 사라져 버렸어도 어떤 방법으로 책은 헌책방에 다시 나와 새 주인을 맞는다. 그런 미스터리한 순환이 계속 되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보통 동인지가 아니었다…….
[안개저택]을 읽은 뒤 미쓰다 신조는 본인에게만 보이는 기분 나쁜 안개를 만난다. [자식귀 유래]를 읽은 뒤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아기의 손에 쫓겨 식은땀을 흘려야 했고, [오락으로서의 살인]을 읽은 뒤로는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친구 아스카 신이치로와 몸싸움을 벌여야 했다. 심지어는 [슈자쿠의 괴물]을 읽은 죄로 한밤중에 살인귀와 대면하게 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된다.
이 모든 괴현상의 원인은 『미궁초자』였다. 그 기괴한 책은 독자의 눈앞에 이야기의 환상을 현실로 불러오는 기이한 힘을 가졌다. 이야기의 환상을 논리적으로 풀어내지 못하면 현실이 된 환상에 갇혀버리고 만다. 이전에 『미궁초자』를 가졌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르는 것이다. 미쓰다 신조와 아스카 신이치로는 스스로 탐정역을 자처하고 『미궁초자』에 실린 이야기들의 환상을 부수어 나가기 시작한다. 안개 저택의 아름다운 소녀는 어째서 하루아침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일까? 자식귀 미라를 구경하던 부모의 눈앞에서 증발한 아기에 대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친구를 죽이고 싶다는 해괴한 글을 남긴 살인마는 누구일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연적을 독살한 범인은 누구일까? 10년 전 S지방의 산장 ‘암벽장’에서 일어난 고교생 몰살 사건의 내막은 무엇이었을까? 이야기의 진실을 추리해 내야만이 『미궁초자』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독자를 어딘가로 끌고 가 버리는 괴서 『미궁초자』의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 이 책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 미스터리한 존재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인지. 『미궁초자』의 진실에 한발자국 다가섰다고 생각한 순간 미쓰다 신조는 돌연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추리가 과연 정답이었을까? 두려운 감정과 음울한 환상으로 뒤덮인 이야기의 실체는 과연 그런 것이었을까? 『미궁초자』의 마력에서 벗어났다고 자신할 수 있나?
‘책’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번역된 미쓰다 신조의 책이 많지는 않지만 재미만 따지고 든다면 『작자미상』이 단연 최고였노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도조 겐야 시리즈’도 훌륭하지만 장황한 면이 없지 않다. ‘작가 시리즈’의 1편이자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기관 - 호러작가가 사는 집』도 충분히 으스스하고 무섭지만 『작자미상』만큼은 아니었다. 『미궁초자』라는 기괴한 책에 대한 거대한 미스터리 아래에서 그 책에 실린 각각의 이야기에 대한 추리게임을 벌이는 설정이다 보니 호흡이 길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이야기가 강렬해서 적지 않은 분량이 정신없이 읽힌다. 거기다가 이것은 작가 미쓰다 신조가 추구하는 ‘호러와 미스터리의 융합’도 훌륭하게 해내는 기특한 설정인 것이다.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사건편과 해결편을 읽다보면 드디어 『미궁초자』의 미스터리에 가깝게 다가서게 된다.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버리는가 싶어 허탈해질 즈음에 또다시 이야기가 시작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물론 이야기는 여기서 방점을 찍게 되지만 이어지는 백지에 어떤 글자가 새로이 떠오르는 환상을 본 것 같기도 하다. 문득 내가 『미궁초자』를 읽어버렸다는 낭패감과 함께 나는 이야기의 환상 속에서 진실을 꿰뚫어 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일 아침에 기분 나쁜 안개에 휩싸이게 되는 건 아닌지, ‘어이’하고 부르는 괴물과 마주치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악몽은 꾸지 않았지만 으스스했다.
엔터테인먼트 소설로 이만큼이나 여운을 남겼던 책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개인적으로 꼽는 ‘재미있는 소설’ 리스트의 상위에 올려놓아도 좋을 정도다. 이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작가 시리즈’인 『사관장 / 백사당』도 꼭 읽고 싶어 졌다. 이 책이 반응이 좋아야 이후의 ‘작가 시리즈’도 국내에서 빛을 볼 터인지라, 부디 이 책이 많이많이 읽히기를 기도하고 싶어졌을 정도다. 일상이 무료하고 즐거운 일이 하나 없다 싶을 때, 서늘한 자극이 부족하다 싶을 때 이 책을 읽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사관장 / 백사당』도 꼭 읽어야겠다. 나는 이 책으로서야 이 작가에게 진정으로 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