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는 클라스’를 통해 대중에게 더 알려진 김누리 교수는 한국 정치, 한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한다는 책의 문구처럼 최근 유튜브 채널이나 인터뷰에서도 지식인으로서 일침을 날리기 때문에 인기가 높다. 서울대, 독일 브레멘 대학에서 독문학을 공부했고, 독일 현대 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중앙대 독문과와 동 대학원 독일유럽학과 교수이며, 독일유럽연구센터 소장,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러한 오랜 독일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독일 사회에 비추어 우리의 정치, 사회, 문화, 교육을 논의한다.
독일 아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그러니까 글자를 깨우치기 시작할 무렵부터 자기 생각을 글로 쓰는 교육을 받습니다. 국어 교과서를 예로 들었지만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지요. 문학작품을 쓴 작가가 어떤 시대에,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의도로 그런 작품을 썼는지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 즉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이에 대해 자신의 비판적 견해를 표명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p69
매우 동감한다. 아이들을 키우며 교육시킬수록 우리나라의 교육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지 못하는 교육을 강화한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오직 정답을 찾는 연습만을 시키는 우리의 교육은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게 하고 정답만 찾도록 강요되어진다. 예를 들어, 최근 수능시험에서 언어영역이 어려워지면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교육한다. 학생들은 문학, 비문학, 문법 등 방대한 양을 공부하고 배우지만 진정 무엇을 배우는지 모르겠다. 저자의 의도를 잘 파악하였는지, 작품 속에서 어떤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은유와 상징을 배우면서도 거기에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고정된 틀 안에서 모든 학생들이 하나의 정답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이런 교육이 어떻게 생각하는 힘을 기르겠는가? 하나의 작품에 대한 하나의 해석만을 정답으로 삼고 그것만 가르쳐서야 어떻게 개개인의 다양한 생각을 존중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것이 우리 교육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작품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고, 새로운 해석을 해낼 수 있는 힘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서 독일을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패망국으로 일본과 같지만 패전국으로서 과거청산의 모습은 일본과 달랐고, 우리나라처럼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에 의해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는 분단을 겪었지만 자신들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어냈다.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유럽의 중심이 되는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아시아의 중국처럼 패권주의로 인하여 주변국들이 공포를 가지는 대상이 되지 아니하고 유럽연합의 힘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점들이 일본, 중국, 한국이 독일의 사례를 함께 연구해서 아시아 평화 공동체를 만드는데 선구자 역할을 해야하는 이유다.
독일은 성공적으로 과거청산을 이루어냈고, 평화적으로 분단을 극복하여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주변 국가들이 독일에 대해 가지고 있던 패권주의에 대한 공포도 상당히 불식시켰습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그 때문에 주변국들이 굉장한 공포를 갖고 있었는데 그 두려움을 풀어준 것이지요. 이제는 독일에 대한 공포를 가진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이 세가지 문제, 즉 과거청산, 분단, 패권주의의 문제 중에 하나라도 풀리지 않았으면 유럽연합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p85
우리나라는 분단체제 때문에 학교에서조차 총검술, 교련 수업을 해왔고, 반공 교육도 투철하게 시켰다. 저자는 이런 군사교육, 파시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우리 세대가 과연 정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가능했을까, 성숙한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 라며 회의했다. 독일에서 살면서 왜 우리가 독일과 다를까를 고민했고, 우리 사회의 군사문화가 나를 파시스트로 훈육했고 집단주의와 권위주의가 나의 내면을 불구화시켰다고 말했다.
한국인으로서 우리들이 받은 교육은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것이었습니다. 군사문화의 잔재가 깊게 배어 있는 교육이었고, 인권을 경시하고 끊임었는 경쟁과 희생을 강요하는 교육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교육이라기보다 ‘반교육’에 가까웠지요. 이런 반교육, 파쇼 교육의 잔재가 지금도 우리 내면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대다수는 ‘내안의 파시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억압의 문화, 부조리의 상황을 하나의 문제로서 인식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물의 질서’, ‘세상의 이치’, ‘자연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자면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정상성의 병리성’이었던 것입니다. p95
그는 소위 말하는 386세대의 성취와 한계에 대해서 논한다. 그 세대는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만든 주역이고 대한민국은 민주화 운동을 통해 정치 민주화는 이루었으나 사회 민주화, 경제 민주화, 문화 민주화는 이루지 못했다. 20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동독을 택하면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p100
이 말은 보편적으로 확장된다. 폭력을 보고 자란 자녀는 폭력적이 되기 쉽다. 이 말은 폭력의 대물림, 미워하면서도 닮아가는 현상들을 대변해주는 말로 통찰력이 있다. 대학시절 내내 군사 파시즘을 경험한 86세대가 부지불식간에 파시즘을 내면화한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성찰해보자는 그의 지적이 와닿는다. ‘내안의 파시즘’, ‘아주 일상적인 파시즘’, ‘꼰대론’은 이런 역설적 요소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사회의 기득권 구조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는 현상도 설명된다. 지배의 주체만 바뀌었을 뿐 사회의 비정상성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정치 민주화를 넘어서 실체적 민주화를 이루어내지 못한 원인으로 저자는 68혁명을 이야기한다. 68혁명이 무엇이지? 저자에 따르면 68혁명은 1968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대변혁을 겪었던 시기를 칭한다. 68혁명을 통해 독일은 새롭게 태어났다. 반공 전선의 첨병이던 냉전 국가는 유럽의 평화를 이끄는 탈냉전 국가가 되었고, 경제성장에 치중하던 성장 국가가 사회적 분배를 중시하는 복지국가로 변했으며, 나치의 유산이 썩어가던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과거청산 국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반공교육, 베트남전의 영향으로 그 물결이 와닿지 못했다고 한다. 새로운 사실이고 놀라웠다. 우리의 근현대사 교육과정에서도 68혁명을 다룬 적이 없는 것 같다. 또한 우리나라가 전 세계가 반대하는 베트남전쟁에 지상병을 파병한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여러 나라들이 미국의 압력으로 베트남전에 참여하긴 했지만 모두 지상병이 아닌 소수의 비전투병을 파병했을 뿐인데 실제 전투에 참여하는 지상병을 파견한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이다. 애국, 반공, 친미라는 이념에 휩쓸려 우리는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못했구나. 나는 많은 부분 저자의 생각에 동감했고 그의 통찰력에 감탄도 했다. 다만, 몇몇 부분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이 책 덕분에 비판적 사유를 함양한 덕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지금이라도 86세대의 내면에 남아있는 도덕적 정체성이 한국 사회를 개혁하고 변혁하는 중요한 동력으로 살아나야 한다고 말한다. 86세대가 명백하게 수구 보수 세력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가?
인권감수성이나 난민에 대한 견해도 그러했다. 난민에 대해 독일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는 환영의 문화가 자연스러웠던 반면 우리는 나이든 사람들이 세계의 흐름과 뒤떨어진 시대착오적인 사회를 만들어 놓아서 우리 젊은 세대가 강팍해졌다고 했는데 이것도 이분법적으로 나이든 세대가 사회를 잘못 만들어놓아서 그렇다는 일방적인 시각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미투와 페미니즘, 성인지 측면도 그러했다. 문제제기와 비판은 있지만 해결책이 없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을 사회탓으로 돌리거나, 한국의 남성문화를 들어 남성 가해자 몇몇의 도덕성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충고하면서 그런 남성 지배문화를 개혁해야 할 주체가 한국 여성운동 세력이고 그들의 과제라고 떠맡기는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가해자의 모습 같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독일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비판하는 많은 것들에 공감했다. 68혁명의 부재, 독일의 교육에 비추어본 한국 교육의 문제점, 한국의 파시즘적인 문화, 집단주의적 문화, 반쪽짜리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과 원인 분석은 탁월하다. 물론 원인 분석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고 훌륭하다. 그러나 곳곳에서 보이는 86세대의 미화, 실체적 해결책이 없는 비판이 다소 아쉬울 뿐이다. 제목처럼 “우리의 불행이 당연하지 않습니다.” 라는 단언에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라는 부제를 달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