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기사단장 죽이기 1권 / 현현하는 이데아
저자_ 무라카미 하루키
발행_ 2017년 7월 12일 초판
분량_ 565쪽
*지금 작성하는 리뷰는 <기사단장 죽이기> 1권만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스토리는 이 소설이 어떤 측면에서는 추리극에 가깝기 때문에 줄거리는 가급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이야기 기본 틀
서술자_ 나 (36세. 화가). 주인공. 초상화를 직관적으로 잘 그린다.
아마다 도모히코_ 92세 치매 노인. 화가.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사람.
멘시키_ 거액을 제시하며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
기본 서사_ 아내와 이혼을 하고 다시 결합을 하기 전까지(?) 이별을 했던 9개월 간의 이야기. '나'는 아마다 도모히코가 없는 그의 집에 살게 된 경위와, 그 곳에서 사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회상하고 있다.
>> 책 속으로
1권의 내용은 102쪽에서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지루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림을 발견하고 그 그림이 모짜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설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속도감이 붙는다. 그리고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과 또 다른 한 명의 생소한 인물의 특징을 설명할 때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대하고 있는 듯한 생생한 긴장감마저 돈다. 문장력과 서사의 힘이다. 그리고 131쪽에서 멘시키가 등장하면서, 드디어 인물 간의 갈등도 엿보이면서 이야기가 슬슬 재밌어진다.
하루키의 소설은 문장이 어렵지 않다. 술술 익히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마무리가 딱 떨어지는 맛은 없다. 장면과 사물과 심리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많다. 그리고 그것의 이유는 또 뚜렷하지 않다. 마치 그날그날 바뀌는 인상처럼, 또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기억의 흐름처럼 말이다.
15쪽에서. 종종 사진을 찍을 때 실제 크기를 가늠할 셈으로 피사체 옆에 담뱃갑 따위를 놔두곤 하는데, 내 기억의 영상에 놓인 담뱃갑은 기분에 따라 멋대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 같다. 아마도 사물이나 현상이 쉼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에 대항하듯이, 내 기억 속에서는 고정불변이야 할 잣대마저 움직이고 변화하는 모양이다.
기억 속에 고정불변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어느 시점에서 어떤 마음으로 그 기억을 떠올리느냐에 따라 달아질 뿐.
서술자 '나'는 이제 오페라와 후라이팬도 구분하지 못할 치매에 걸린, 그래서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에 대한 생애를 자주, 길게 언급한다. 그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한 인상도 묘사가 뛰어나다. 그리고 그림 속의 인물에 대한 설명이 집요할 정도이다. '나'라는 인물이 노화가의 생애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 자주 '하루키'의 모습이 떠오른다. 노화가의 생애와 성격과 그의 작품성을 설명하면서 작가는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나 보다.
71쪽에서. 원래 아버지 전공은 서양화야. 그래서 빈으로 유학을 갔고. 당시에는 굉장히 모던한 유화를 그렸지. 그런데 일본으로 돌아오고 얼마 뒤에 갑자기 일본화로 전향했어. (중략) 외국에 나가보고 새삼 민족적인 정체성에 눈뜨는 거. (중략) 자식 입장에서는 그저 까다로운 아저씨였을 뿐이야. 머릿속은 온통 그림 생각뿐이고.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서 사셨어. 이제는 전부 옛이야기지만.
아내의 느닷없는 이혼하자는 말에 당황하고. 자신의 집에서 나온 '나'는 몇 개월 길 위를 달리면서 방황을 한다. 그리고는 시각적 기억력을 바탕으로 직관에 의지에 초상화를 그리던, 그쪽 업계에서 꽤 잘 나가던 일을 그만둔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 보겠노라고. 살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미대 동창 친구의 도움으로 그의 아버지가 산속에서 오래 외롭게 지내던 그곳으로 그를 안내한다.
'나'가 노화가 아마다의 집으로 간 것부터 이야기는 환타지라 할 수 있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그리고 그것의 콜라보 같은, 노화가의 숨겨진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 그것의 상관성을 파헤치는 듯한 추리 소설 같은, 복선이 난무하는 분위기. 그러나...
95-96쪽에서.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깊게 둘어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의 뜨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위에서 인용한 부분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작가의 메시지 (또는 이야기의 주제)가 아닌가 싶다.
다 읽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이치에 맞다고 여겼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 알고 보니. "갑작스런 우연이었으며 불가사의한 일이었다."라고 밖에 말할수 없는 것들. 그런 이야기를 노화가의 굴곡진 생애와 비밀스럽게 간직된 그림을 빌어서 전개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나'라는 인물이 초상화를 그리는 방식이다.
시각적 기억력에 의존하는 방식.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과 몇 시간의 대화를 통해서. 남은 기억들을 바탕으로 직관에 의해서 그 사람의 인상, 특징, 보이지 않는 무엇을 끄집어내는 방식. 의뢰인을 몇 시간, 며칠 동안 한 자세로 세워 놓고 그리는 방식이 아닌. 화가 자신의 기억 속에 포착된 인상과 느낌을 그려내는 방식. 그래서 초상화 속 인물과 실제 인물은 닮지 않은 듯 한데. 초상화 속 인물이 오히려 더 실제 인물다운 느낌을 주는 것.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초상화들을 감상하고 싶은 심정이 든다.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 속 다섯 번째 인물도 실제로 보고 싶은 욕망(호기심)이 들 정도이다. 과연 어떻게 그려졌길래. 그 그림에 대한 묘사가 장황하고 실감이 나는지 말이다.
어쩌면 글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실 세계보다 이야기 속에 묘사되고 설명되는 어떤 장면이 오히려 더욱 현실 세계같다는 생각과 그래서 몰입하고 빠져 들고 마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 특히 사람의 묘한 심리, 우연적인 만남, 관계를 맺는 일, 알 수 없는 사건의 전개 등등에서 말이다
그런 장면과 시간을 작가는 너무나 잘 포착하고, 잘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소설 속의 초상화가로 등장하는 '나'처럼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불가사의한 일들이 난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려도. 주인공 남자는 제자리에 돌아오려고 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항상 원상 복귀라는 흔해빠진 표현을 추구한다. 하루키 작가는 이야기와 사랑의 힘을 믿는 작가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15쪽에서. 그 두 번의 결혼생활 (전기와 후기라고 해 두자) 사이에는 약 아홉 달이라는 시간이 험준한 지협에 뚫린 운하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아홉 달 남짓 -이 시간이 이별의 기간으로 길었는지 짧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영원에 가까웠던 것 같기도 하고, 의외로 순식간에 흘러간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은 상대적 개념이다. 기억의 당사자가 순식간처럼 또는 영원처럼 느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맞는지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억으로 떠오른 인상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이 책 속의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 같다. 서술자 '나'의 기억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당황하고 놀라고 비밀을 만나면, 그저 흥미로울 뿐이다.
>> 책장을 덮으며
이야기 전개가 흥미롭다. 꿈인가? 생각하게 하는 장면들도 있다. 초반에 '나'의 아내가 '꿈'이야기를 하면서 이혼하자고 하는데. 꿈을 믿는 아내 덕분인지. 자꾸 '꿈'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게 된다. 그림 속의 기사단장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아무튼. 이야기 속의 화가 '나'의 탁월한 직관이든, 작가 '하루키'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든, 그들의 재능은 귀한 대접을 받을 만큼. 이 책은 장면 묘사와 그림, 사물, 인간 관계, 우연, 물리적 반사 등에 대한 설명이 지루하지 않게 펼쳐진다는 사실이다.
335쪽 내용을 인용하면서 1권의 리뷰를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2권의 이야기도 조만간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335쪽에서. 여기서 펼쳐지는 모든 일이 멘시키라는 사람의 등장과, 예의 한밤의 방울소리와 더불어 시작된 듯 느껴졌다. 멘시키는 말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깊은 해저에서 발생한 지진 같은 거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햇빛이 닿지 않는 세계에서, 다시 말해 은밀한 무의식의 영역에서 커다란 변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지상으로 전해져 연쇄반응을 일으킨 결과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저는 예술가가 아니지만 그런 프로세스의 원리는 대강 이해할 수 있어요. 비즈니스상의 뛰어난 아이디어도 거의 그와 비슷한 단계를 거쳐 탄생하니까요. 탁월한 아이디어란 어둠 속에서 근거 없이 나타나는 사념인 경우가 많죠.
하루키의 소설에서 언급하는 빛나는 문장들은, 어쩌면 어둠 속에서 근거없이 나타난 사념이 아닌가 싶다. 마치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이 천장 다락방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