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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역사유적지구 정림사지

 

사적 제301호.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 낙양성() 내의 황궁과 영녕사()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백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진 석탑이지만, 초층 하부에 있는 소정방()의 평제기공문(), 즉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새긴 글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평제탑()’으로 불렸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란 명문이 적혀 있어,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 출처 : 네이버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구조

 

매번 석탑만 보고 그냥 지나쳤는데 이렇게 구조를 알고 나며 석탑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보는만큼 알고 아는만큼 이해한다는 말이 절실히 느껴진다.

알지 못했던 부분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이 많으니 ㅠㅠ

 

 

 

본당의 불상 미소가 온화하다.

이런 미소가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앗을지 모르겠다.

이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근심,걱정이 사라지는듯 하다.

 

 

작년에 갔을때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수학여행을 온 많은 학생들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어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아니라 모르는 학생들의 사진만 남기게 되었으니 ㅠㅠ

토요일이라 차는 많이밀렸지만 오히려 한가한 느낌이다.

찾아오는 이가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오기도 한다.

우리들은 한적함을 느낄수 있어 좋았지만 주말인데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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