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에세이집은 호흡이 짧아서 빨리 읽게 되는 책들 중 하나다.
그래서 간만에 장거리로 어딜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겨 버스에서 읽을 책을 고르다 미쳐 읽지 못한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손에 들고 버스에 올랐다.
덕분에 갈 때 절반, 올 때 절반 책을 모두 읽을 수 있었고 뿌듯한 여행길이 되었다.

장수고양이의 비밀은 하루키가 95년부터 약 1년 넘게 신문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엮은 책이다. 그래서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하루키의 말랑말랑한 글들이 엮여져있다. 책 속에 하루키는 자신이 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에세이를 읽으며 나는 거짓말하는 하루키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말인즉 그는 자신이 소설속에서 거짓말을 잘한다고 했기 때문에 독자로썬 하루키의 거짓말인 소설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는 뜻이다. 나또한 습작으로 소설이랍시고 이것저것 긁적여본 경험이 있어서 아무리 이야기를 지어낸다하더라도 그 안에 자신이 담길 수밖에 없음을 안다.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을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 그의 일부가 들어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말랑말랑한 에세이는 소설로 성공해 부족할 것없는 유명작가의 안락함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이것이 그의 '본질일지도 모를' 일부에 불과할 수 있다지만(책에서도 밝혔듯) 나는 왠지 상실에 대한 아픔과 기묘한 상황을 헤쳐나가는 쿨한 캐릭터들이 춤추는 또 다른 하루키의 일부가 더욱 정이 갔다. 이런 경험은 사실 일상다반사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멀리서 너무 선망하던 인물을 만났을 때 그도 나와 같은 인간이거나, 어쩌면 기대했던 것보다 못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실망하는 것과 마찬가지. 물론 하루키가 못난 인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즉, 우리가 간과하는 인간의 다양성을 또한 번 경험했다고나 할까. 누구나 내 기준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을 함부로 평가해선 안된다. 그것이 좋은 평가이든 나쁜 평가이든 그 사람은 분명히 내가 모르는 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튼 에세이 속 하루키는 서양을 동경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고, 특이한 러브호텔의 이름을 찾는 수집가, 세상 물정 모르는 멍청이, 그 속에 확고한 주관을 가진 정체성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있다. 나는 그것이 이 작가의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어떤 인간으로 보일까를 두려워하며 자체적으로 검열해서 쓰기보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등리 가장 지녀야할 덕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지만 중간중간 소설의 문구처럼 생각의 고리를 건드리는 문구들이 있다.
"건강 자체가 반드시 선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굳이 정의하면 건강은 선의 시작을 알려주는 한 가지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찔러 발밑이 우르르 무너지는 심정이 된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고달픈 나날이었다... 그러나 괜찮다. 크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나이가 들면 그렇게 처참할 정도로는 상처받지 않게 된다."
"이런일도 생기는 법이다, 라고 그 때 문득 생각했다. 형체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요즘 연일 악화된 한일관계에 대한 뉴스가 쏟아져나온다. 이럴 때마다 국경없는 예술가들은 범주화에서 벗어나 무엇이 평화를 위한 길인가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가지고 따지고 올라가다보면 진실과 정답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비치는 법이다. 그 때 예술가들은 흔들리지 않고 소신을 정직하게 밝혀야 한다. 왜냐하면 "비판받고 험담을 듣는 일이 즐겁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속는 건 아니기 때문(p286)"이다. 에세이집에는 하루키가 일본사회의 내재된 획일성을 강요하는 문화를 비판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현재 일본 극우 정치에 대한 획일성을 그 역시 오래전부터 우려하고 경계했던 것은 아닐까.
무튼 하루키의 어떤 정체성도 인정하고 받아드릴 마음이 있는 팬이라면 읽어봐야할 책임에 틀림없다.
개인적으로 좀 더 처절한 하루키가 좋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