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히 흐르는 강 아래 잠긴 작은 조약돌 두 개를 건져낸다.
손 위에 두 돌은 오랜 세월 강에 잠겨있었는지 강비린내가 나기도 하고,
흘러간 세월만큼 마모되어 둥글둥글 깍여져 있다.
돌을 움직여보면 빛에 반짝반짝 빛나기도 하다.
사회학자는 그 돌을 이리저리 살피고 다시 강 바닥 아래에 돌이 있던 그 자리에 놓아둔다.
손에 남은 축축한 느낌은 돌이 남기고 간 강의 흔적인지, 사회학자의 눈물인지 알수는 없다.
누구도 건져내 살펴보지 않은 그 두 개의 조약돌들은 사회학자를 통해 어떤 의미가 되었고,
또 다시 흘러갈 알 수 없는 물길에 몸을 맡긴다.
나는 교수님의 책을 읽는 내내 어느 고요한 강 한 가운데 서서 조심스레 돌들을 손에 쥐고 살피는 사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가끔 가슴이 서려지는 한기를 느낄 때도 있었고, 어느순간에는 소금에 서서히 절여지는 배추처럼 숨막힘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의 부모가 언젠가 걸어갈 길을, 내가 그들을 기억해야할 시간들을 절절히 느낀 까닭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 교수님은 아마 그보다 더한 심정으로 이 책을 썼으리라.
감히 짐작 하기 조차 두렵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을 쓸 당시 야만에 몸을 맡긴 독일인들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든 '계몽'그 자체를 되새겨봄으로 전쟁의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이해하려고 했다.
나는 교수님의 책을 읽으며 생각이 다른, 세대가 다른, 이해하기 어려운 집단에 대한 비난이 아닌 그들의 맥락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 마음 여린 사회학자의 사랑을 느꼈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이 되려나.
사회학은 사회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때로 어려운 이론이나 용어로 그것을 푸는 것보다 우리의 생활과 그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누군가에 의해 던져진 투망들과의 관계를 그저 드러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반성은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노명우 교수님의 인생극장은 세대와 문명의 발전과 흐름 속에 잠긴 채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는 그저그런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바깥으로 꺼내 잠시나마 공기를 쐬어 주는 책이었다.
SNS에서 우리는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고 드러내고 있다고 자위하지만 그것은 왜인지 더욱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만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인지 더욱 이런 이야기가 좋다.
평범한 나의, 너의, 우리의 삶을 그저 살아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지금 서 있는 곳을 생각하고, 나아갈 곳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그런 이야기.
진짜 나를 표현하고 그것을 역사로 스스로 기록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
아마 이 책이 그저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영화처럼 되돌아보고 남기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문화흐름의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