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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균 발견 이후

 

이질균 발견 이후 시가는 결혼과 함께 1900년 독일로 떠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연구소에서 파울 에를리히의 연구실로 들어가는데, 트리파노소마증에 대한 치료법 연구를 수행하다 1905년 일본으로 귀국하여 기타자토의 연구실에 합류하게 된다. 그의 기타자토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하여 1914년 일본 정부가 기타자토의 전염병 연구소를 도쿄제국대학의 산하로 강제 편입시키자 사임하고 기타자토 연구소를 세운 기타자토를 따라간다. 1920년 게이오대학 의학부의 교수가 되었지만 시가는 바로 그해 정부의 요청에 식민지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다.

 

시가가 조선으로 건너와 처음 가진 직책은 조선총독부의원장 겸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정이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게 되는데 시가는 의학부장을 거쳐 1929년에는 경성제국대학 총장에 취임하여 1931년까지 지내게 된다. 그러니까 그가 조선에서 활동한 기간은 10년이 넘는 셈이다. 그는 조선에서 서양의학의 보급을 중시했고, 조선인 의학자 양성에 힘을 쏟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전통적인 한방의학(이른바 의생(醫生))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교화의 대상으로 여기고 폄하했다. 학문의 순수성을 믿었던 그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식민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나, 어쩔 수 없는 일본인 출신으로 정치성이 표면화되기도 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 시절 일본인 교수의 조선인 차별 발언에 조선인 학생들이 항의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게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잘 파악하지 못했고, 경성제국대학 시절 한센병 치료와 관련해서 서양 선교사와 조선총독부 사이의 다툼에서 강제격리주의를 고집한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시가는 그의 영원한 스승인 기타자토의 연구소로 다시 들어가 이질과 결핵 등에 대한 연구를 1945년까지 수행하였고, 1957년 여든 다섯의 나이로 죽는다. 시가가 죽었을 때 뉴욕타임스 지는 부고에서 그가 가장 활동적인 시기에 세균학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4, 5명 중 한 명이라고 했다.

 

1936년 하버드대학 300주년 기념 연설에서 시가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일을 평가하며 지속적인 연구를 촉구했다.

이질균의 발견은 이 질병을 퇴치하겠다는 희망을 가진 나의 젊은 심장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여전히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한때 그토록 밝게 타오던 희망의 빛은 여름밤의 꿈처럼 희미해졌습니다. 이 신성한 불은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시가 기요시의 붓글씨.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말고, 스승의 정신을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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