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열, 혹은 전쟁열, 그리고 안네 프랑크
‘감옥열’, ‘전쟁열’, ‘기근열’ ‘아일랜드열’, ‘캠프열’, ‘선박열’, ‘병원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질병. 바로 발진티푸스(typhus fever 또는 epidemic typhus)다. 감옥열, 전쟁열, 캠프열, 선박열, 병원열 등의 이름은 밀집된 환경에서, 그리고 위생이 열악한 상황에서 잘 발생하고 전파력이 높았던 사정을 반영하고, 기근열이라든가 아일랜드열은 1840년대 아일랜드의 감자대기근 당시 이 질병이 창궐했던 데서 나온 이름이다.
매독에 대해서 각국이 자신들이 싫어하는 나라의 이름을 병명으로 삼았다면 발진티푸스는 질병이 나타나는 상황을 반영해서 불려진 셈이다. 사소한 범죄도 사형으로 다스리던 수백 년 전 영국에서 올가미에 의한 죽음보다 티푸스에 의해 죽는 죄수가 더 많았다고 하니까 밀집된 환경에서 벌어진 이 질병에 의한 참상이 짐작이 간다. 일례로 1577년 영국 옥스퍼드의 한 죄수가 510명에게 죽음의 천사가 되었는데, 당시 죽은 이들 가운데는 판사 두 명, 군수와 부군수 각 한 명, 치안관 여섯 명, 대부분의 배심원들, 수 백명의 대학원생들이 포함되었다. 이때부터 영국에서는 판사가 감염을 막기 위해 코가리개를 쓰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발진티푸스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스페인 군대가 이슬람교도가 점령하고 있던 그라나다를 공략했을 때이다. 이른바 레콩키스타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이다. 스페인은 그라나다 공략을 위해 키프러스의 용병을 수입하였는데 그들이 군대에 합류한 직후 스페인 군인들이 앓아눕기 시작했다. 두통, 고열, 전신 발작으로 시작해 얼굴이 검게 부어오르면서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혼수 상태에 빠져 죽었다. 이때부터 이 병은 ‘티푸스(typhus)’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연기 자욱한 ’, ‘희미한’, 또는 ‘흐릿한’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티포스(typhos)에서 유래된 말이다. 당시 스페인 군은 약 2만 명 가량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3,000명은 전투로, 1만 7,000면은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라나다에서 출발한 발진티푸스의 진군은 스페인, 프랑스를 거쳐 전 유럽을 휩쓸게 된다. 1528년 나폴리를 공격하던 프랑스 군대가 발진티푸스의 공격을 받아 2만 8,000명의 병사 중 절반 가량이 숨졌고, 그 결과로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가 이탈리아의 지배권과 클레망소 7세의 교황권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클레망소 교황이 헨리 8세의 이혼 요구를 거절한 이면에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의 분노가 두려워서라는 얘기가 있다. 이후 교황의 간섭을 뿌리치고자 헨리 8세는 영국국교회를 만들어 스스로 수장에 오르게 되는데 그렇게 본다면 발진티푸스는 간접적이지만 영국 종교 개혁에 기여한 셈이다.
발진티푸스가, 아니 감염병이 역사의 행로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례로 대표적으로 드는 것이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이 이 질병으로 좌절된 것이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많은데, 그보다도 나폴레옹 군대를 괴롭힌 것은 모스크바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승을 부린 발진티푸스였다고 볼 수 있다. 덥고 건조한 기후 속에 출발한 50만의 대군은 위생 조치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러시아를 향해 진군하던 군대가 폴란드를 가로지를 때 즈음부터 병사들이 발진티푸스와 이질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약 5분의 1이 죽거나 병에 걸려 병사로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들어선 나폴레옹에게는 겨우 13만 명의 군대밖에 남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전투를 거치면서 발진티푸스 환자가 더 늘어 9만 명의 군대만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진격할 수 밖에 없었다. 전염병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오합지졸과 같은 군대가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는 불타고 있었다. 폐허 속에서 먹을 것도 없었고, 질병은 더욱 만연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의 세계 정복의 야망을 꺽은 데 발진티푸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발진티푸스에 의한 희생자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안네 프랑크다. 유태인 소녀로 나치를 피해 2년 동안 숨어 지내며 쓴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가 아우슈비츠에서 독가스에 의해 죽었다고 알고 있을지도 모르나 직접 사인은 발진티푸스였다. 안네와 그녀의 언니 마고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베르겐-벨센 강제수용소로 옮겨진 후 감염되어 사망했고, 며칠 수 그들의 어머니도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안네 프랑크가 단지 감염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안네 프랑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