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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에를리히와 노벨상

 

파울 에를리히는 혈액학, 면역학, 약리학, 화학요법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긴 과학자다. 각 분야에서 생물학적인 원리를 정의했으며, 그 정의에 기초한 실질적인 의미와 의학적인 적용 가능성을 보여주어 이른바 중개 의학(translational medicine)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아이디어 중에는 후대의 과학자들게 영감을 주어 새로운 발견을 이루도록 한 것이 적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측쇄이론(side-chain theory)’인데, 그는 이 이론을 통해 세포에는 외부 분자와 결합하는 특정한 세포막의 구조가 존재한다고 제안했다. 이 이론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수용체-리간드 개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에를리히의 가장 큰 업적을 들라면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인체의 면역 반응을 설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원균을 죽이는 화학요법에 대한 공헌이다.

 

190854세이던 해에 에를리히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건 면역학에서의 업적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물리학이 격변을 겪고 있듯 미생물학이 등장하고 있었고, 동시에 면역학의 기초가 세워지던 시기였다. 미생물학과 면역학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일례로 당시 면역학 발전을 선도하던 두 기관이 세균병인설을 확립한 파스퇴르와 코흐의 연구소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기관은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국가의 경쟁 관계 못지 않게 세균학은 물론 면역학에 관해서도 아주 적대적인 경쟁 관계였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대표적인 면역학자는 우리에겐 유산균 음료 때문에 잘 알려진 러시아 출신의 메치니코프였고, 코흐 연구소에서는 에를리히가 가장 대표 연구자라 할 수 있었다. 메치니코프는 식균 현상을 발견하여 현재 자연 면역, 혹은 세포성 면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면역 반응이라고 주장했고, 에를리히는 항원-항체 반응, 즉 지금은 체액성 면역, 혹은 적응 면역이 면역 반응의 요체라고 봤다. 서로가 한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찾는 것과 동시에 상대방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다. 루바 비칸스키는 메치니코프에 대한 평전 메치니코프와 면역에서 이렇게 논문 한 장 한 장에 적힌 글로 신랄한 평가가 오가는 전쟁터 같은 분위기 속에서, 면역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아직은 면역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시대였다. 노벨상 위원회는 이처럼 중요한 주제이자, 또 계속 놀라운 논문이 나오는 분야에 대해서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하였으나 파스퇴르 연구소와 코흐 연구소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기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노벨상 위원회는 묘안을 내는데, 메치니코프와 에를리히 둘에게 모두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묘안이라기보다는 절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묘안 내지는 절충은 결국은 옳은 결정이 되었다. 우리와 같은 척추동물의 면역 작용은 세포성 면역과 체액성 면역이 둘 다 작용하는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에를리히는 그렇게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파울 에를리히는 1854년 베를린에서 남동부로 약 240 킬로미터 떨어진, 지금은 폴란드 영토가 된 작은 마을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부유한 유대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여러 의대를 전전했는데, 당대의 보편적인 의과대학의 강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이 컸다. 대신 인체 조직을 염색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의 사촌 카를 바이커트는 후에 병리학자가 되었는데, 인간과 동물의 조직을 염색하는 방법인 아닐린 염색법을 개발한 인물이었다. 에를리히도 자연히 염색법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는 사촌이 개발한 염색법을 발전시키게 되는데 바로 조직 표본에 있는 세포의 각 부분이 서로 달리 반응하여 서로 다른 농도를 나타내게 함으로써 윤곽을 뚜렷하게 만드는 방법인 선택 염색이라고 하는 기술이었다(이게 그의 박사 논문 주제였다). 당시 독일은 염료 산업이 매우 발달한 나라였다. 라인강을 따라서 많은 염료 공장들이 있었고, 그 염료 산업이 지금의 거대 화학기업이자 제약회사인 바이엘 같은 기업으로 발달했다. 그런 배경에서 염색법 연구가 활발했고, 그람 염색법 역시 에를리히의 염색법에 착안하여 개발된 것이었다.

 

그는 1891년 베를린의 코흐 연구소에 합류하여 코흐와 5년 동안 함께 연구했다. 코흐와 함께 결핵을 연구하는 도중 결핵에 걸려 이집트에서 2년간이나 요양해야만 했지만 다행히 회복됐고, 1896년 새로 만들어진 혈청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되었으며, 1899년에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실험요법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그는 특정 미생물이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 환자의 몸에서 면역력이 생기는 원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였고, 면역 세포가 미생물과 외래 분자를 인식하는 원리를 규명함으로써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파울 에를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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