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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구인가?

 

로날트 D. 게르슈테의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에서는 콜레라균과 관련하여 “1883, 콜레라의 정체가 당대 최고 세균학자의 현미경을 통해 드디어 밝혀졌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당대 최고 세균학자는 다름 아닌 로베르트 코흐이다. 그밖에도 아노 카렌의 전염병의 문화사나 윌리엄 맥닐의 전염병의 세계사등에서도 콜레라균의 발견자는 코흐로 기술되어 있다. 이미 코흐는 1876년 탄저균(Bacillus anthracis)의 정체를 밝혀내고 1882년에는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을 발견해서 명성이 하늘을 찌르던 과학자였다. 코흐는 이집트에서 콜레라가 발병했을 때 독일과 프랑스가 모처럼 힘을 합쳐 파견한 연구팀의 책임자였다. 연구팀이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콜레라가 잠잠해진 후라 콜레라를 찾아 인도로 갔다(이집트에서 콜레라균을 찾아냈다고 기술한 책들도 꽤 있다. 아노 카렌의 전염병의 문화사나 윌리엄 맥닐의 전염병의 세계사등과 같은 권위 있는 책들도 그렇다). 코흐는 인도 캘커타에서 콜레라로 사망한 환자의 시신을 부검하여 끝부분이 쉼표처럼 약간 구부러진 균, 콤마균(comma bacteria)’을 발견했다. 콜레라균의 발견이었다. 그렇게 콜레라균의 발견은 코흐의 업적 중 하나로 기술되고 있고, 그렇게만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어떤 기록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다. 바로 이탈리아의 해부학자인 필리포 파치니(Filippo Pacini, 1812-1883)이다. 파치니의 삶은 스노의 삶과 매우 유사하다고 평가받는다. 둘 다 의사였고, 의사로서 남긴 업적도 있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둘 다 콜레라와 연관되어 있다.

 

파치니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도시인 피스토이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신부가 되길 원했으나 결국은 의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삼십 대 중반이 이미 피렌체 대학 해부학과장이 되었고 그의 경력 내내 그 지위를 유지했다. 특히 그의 특기는 현미경 관찰이었다.

 

그의 초기 업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그의 이름을 딴 파치니소체(Pacinian corpuscles) 발견이다. 지각 신경의 말단 장치에서 피부 깊숙이 존재하면서 강한 압력과 빠른 진동을 감지하는 구조인데, 특히 손바닥이나 발바닥에 많이 존재한다.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가 익숙하게 사용했던 현미경으로 찾아내고 기술했다. 1835년에 이미 이를 발표했는데, 토스카나 대공은 파치니가 사용할 수 있도록 피렌치 대학에 더 훌륭한 현미경을 기증하기도 했다.

 

1864년 피렌체에 콜레라가 유행했다. 1846년부터 1863년에 이르는 세 번째 콜레라 팬데믹의 영향이었다. 파치니는 의사로서 콜레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콜레라로 사망 환자의 시신을 부검하고 자신의 특기인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그는 특히 장 점막을 면밀하게 조사했는데, 바로 그곳에서 쉼표 모양의 세균 찾아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세균에 Vibrio라고 명명했다. ‘Vibrate’, 즉 흔들린다는 뜻으로 운동성이 많은 세균이라 이런 이름을 붙였다. 1854년에 자신이 발견한 세균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과학자 집단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존 스노도 자신이 죽기 4년 전에 발표된 이 논문을 몰랐던 것으로 보이고, 30년 후의 코흐 역시 이 논문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파치니는 이후에도 콜레라에 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한다. 그는 세균에 의해서 장 점막이 파괴되어 유체 전해질이 대량으로 빠져나가면서 치명적인 상태가 된다고 하여 아콜레라라는 질병에 대해 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환자들에게 소금물을 많이 마실 것을 권고했다. 현재의 처방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그는 파스퇴르와 코흐 이전부터 세균병인론의 굳건한 옹호자였고, 그래서 콜레라가 전염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아즈마(miasma) 이론을 옹호하는 이탈리아 의사들과 대립했고, 그래서 더더욱 그의 콜레라 발견은 잊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존 스노와 유사한 삶을 살았다고 했는데, 둘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지낸 것도 포함할 수 있을 것 같다. 파치니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아픈 여동생들을 치료하는 데와 함께 과학 연구에 쓰고 거의 무일푼의 상태로 1883년 사망했다.

 

죽을 때까지 파치니가 콜레라균을 발견했다는 업적은 인정받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해에 코흐가 콜레라균을 ()발견했고, 콜레라균 발견의 업적과 명성은 오롯이 코흐에게 향해 있었다. 하지만 1965년 국제명명위원회는 콜레라균의 정확한 이명법 명칭을 Vibrio cholerae Pacini 1854”로 확인하면서 파치니의 업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2003년에는 고메즈-길 등이 그의 이름을 기려 Vibrio pacinii라는 세균 이름을 만들었다. 위대한 업적은 언젠가 인정받는다.

 


필리포 파치니

 


파치니가 제작하여 콜레라균을 관찰한 현미경 슬라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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