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초고에 나에게는 느슨하고 너절한 텍스트라는 벽돌(방울? 구획?)이 몇 개 있을 것이다. 수정을 하면서 그 벽돌들은... 나아지기 시작한다. 곧 벽돌 하나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 벽돌을 끝까지 쭉 통과하는 동안 바늘이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가끔 마음에 떠오르는 말은 ‘좋아, 이건 정말이지 부정할 수 없어’라고 할 때의 그 ‘부정할 수 없음’이다. 이는 합리적인 독자라면 누구나 이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서도 여전히 나와 함께 있을 거라고 느낀다는 뜻이다.
(중략)
글이 잘 써질 때는 지적, 분석적 사고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 이 방법을 발견했을 때 나는 무척 자유로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고, 결정할 필요가 없고, 그냥 그 자리에서 매번 새롭게 내 이야기를 읽으면서 계측기를 지켜보다 행 단위에서 (장난을 하듯이) 고칠 마음만 먹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고친 게 틀렸다면 다음에 읽을 때 되돌려 놓을 기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누군가 “무한한 시간이 주어지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식의 퇴고가 바로 내게 그렇게 느껴진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큰 결정은 필요 없다. 이야기는 자기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있고, 그 의지를 내가 느끼게 해준다. 그것을 그냥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되고, 이야기는 나의 최초의 비전을 뛰어넘는다.“
- 조지 손더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182-183)
그래서 이렇게 쓴다.
“이 방법은 초고의 압제를 전복한다. 초고가 좋든 말든 누가 상관하는가? 그건 좋을 필요가 없다. 그냥 있기만 하면 된다, 당신이 퇴고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는 이야기를 시작할 아이디어가 필요하지 않다. 그냥 하나의 문장이 필요할 뿐이다. 그 문장은 어디서 오나? 어디에서든. 특별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계속 반응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특별한 문장이 될 것이다. 그 문장에 반응하고, 이어 평범함이나 너저분함 가운데 일부를 벗겨내기를 바라면서 문장을 바꾸는 것이... 글쓰기다. 그게 글쓰기의 전부이며 또는 전부여야 한다.” (185쪽)
그렇다. 일단 무언가를 써야, 결국 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