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이 편집한 <거인들의 생각과 힘>은 그야말로 '과학'에 관한 푸짐한 밥상이다.
그런데 나는 이 푸짐한 밥상에 소화불량이 걸릴 지경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푸짐함 때문에 소화불량이다.
몇 개의 음식 쯤이라면 어찌어찌 소화해보겠는데 350년 동안의 온갖 과학적 업적에 대한 20여 명의 각자 최선의 논의는 도무지 모두 다 소화시킬 요령이 생기질 않는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자위도 하긴 한다.)
책 이름 <거인들의 생각과 힘>은 아마도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라"라는 아이작 뉴턴의 글(Google의 학술 검색 첫 화면에 나오는 글이기도 하다)에서 따온 것이리라.
영국 (오로지 영국이라고도 할 수 없다) '왕립학회'의 창립 350주년을 기념해서
왕립학회, 혹은 그와 관련된 인물과 과학적 업적들에 대해 일류의 필진들이 쓴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이 이 책이다.
모든 과학의 중심에 서왔던 왕립학회이니 거기에서 가지를 쳐간 과학의 내용과 업적은 '모든 과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나는 소화불량일지라도 모든 과학을 일별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혹은 순수과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기도, 받기도 한다.
때로는 당당하지만, 때로는 군색하게 답하게 되는 이런 질문에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 책의 저자들은 깔끔한 예를 들고 있다.
우선 빌 브라이슨의 서론에서다.
" 1701년에 출생해서 1761년까지 생존한 그(토머스 베이즈 목사)는 모든 면에서 무능한 성직자이기는 했지만 뛰어난 수학자였다. 언제였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오늘날 베이즈 정리라고 알려진 복잡한 수학 방정식을 고안했다.
(방정식은 생략)
베이즈 정리(Bayes's Theorum)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 식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확률 분포를 계산한다. 불완전한 정보로부터 통계적 가능성을 찾아내는 이런 방법을 역확률 방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베이즈 정리의 놀라운 점은 베이즈의 생전에는 이 정리가 어디에도 쓸모가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간단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계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베이즈 정리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연습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다. 베이즈 자신도 그 가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굳이 논문으로 발표하지도 않았다. 왕립학회의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에 "우연의 원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논문"이라는 소박한 제목의 논문이 발표된 것은 베이즈가 사망하고 2년이 지난 1763년이었다.
그의 친구가 런던의 왕립학회에 논문을 제출했다."
이렇게 누추했던 베이즈의 연습은... 자, 이제부터 베이즈 정리의 화려한 기여가 시작된다.
"사실 그의 논문은 수학사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베이즈 정리는 슈퍼컴퓨터 덕분에 기후 변화 모델링, 일기예보,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결과의 해석 등을 비롯해 사회정책학, 천체물리학, 주식시장 분석 등 확률이 필요한 경우라면
어느 분야에서나 일상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오늘날 그런 정리의 발견자를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은, 근 250년 전에 왕립학회의 누군가가 혹시라도 그 논문을 보존해둘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덕분이다."
(8~9쪽)
그리고, 필립 볼은 순수과학과 응용과학(혹은 공학)에 대해 서술하면서 스티븐 호킹을 인용하고 있다.
"제네바의 CERN에 건설된 세계에서 가장 큰 원자 충동장치인 대형 강입자 충돌장치가 거의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언론 축제 속에서 작동을 시작했다.
그런 실험장치의 실용적인 가치를 묻는 질문에 스티븐 호킹은 '현대사회는 실용적 응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던 순수과학의 발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325쪽)
소화불량이지만 충분히 그걸 감내하고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