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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식당] 순대 없는 순대국밥과 담쟁이 펜시브
오랜 시간 한자리에서 영업하고 있는 식당에 가면, 그 꾸준함과 변하지 않는 성실함 앞에서 절로 겸허해진다. 과연 어떤 일 앞에서 그토록 오래 지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지, 기다리는 이 앞에서 덩달아 초조해지지 않고 차분하게 다독이며 나아갈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돌아보고 내다 보게 된다.
입맛이 까다로운 루나 원픽인 덕천식당인데, 어쩐 일인지 그날 만큼은 우리 세자매 입에 음식이 짰다. "여기 맛이 변했네." 투덜대면서도 "그래도 맛있다"하며 루나와 아현이는 그릇을 깨끗이 비웠고, 나는 가슴에 뭐가 얹힌듯 더이상 먹지 못했다.
비오는 주말에도, 단골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바글바글, 전북대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이 바글바글. 숨을 허옇게 내보이며 속을 채웠다. 계산하고 나오는데 우산을 쓴 사람들이 우르르, 우산 끝에 매달린 빗방울을 접으면서, 열두시 오십구분, 점심 피크 시간이 끝나가는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토록 아직 사랑 받고 있는데, 혹시 내 탓일까. 내 문제일까. 내가 변한걸까. 때로 나는 지치지 않는 사람 앞에서 초조해진다. 굳게 버티고 선 다리가 흔들릴까봐 그럴 기미도 없는 튼튼한 다리 옆에 가서 그를 어깨로 받치고 선다. 애원한다. 흔들리지 말아줘. 괜시리 얼마나 튼튼한지 확인한다. 빈틈은 없는지 세게도 두드려본다. 빗방울이 호도도 눈썹에 맺히고, 코끝에 맺히고, 발바닥까지 온통 젖는다.
그럴 때면 그저 지나가는 이의 작은 한마디도 칼이 돼서 몸을 뚫는다. 누군가의 무심한 일상의 시선도 햇빛에 말리고 돌에 벼리어 움켜 쥐고 가슴에 찔러 넣는다. 달그닥, 하고 그 끝에 뼈가 걸릴 때까지. 그만 생각하자. 여기에 두고 가자. 나는 때로 너무 많이 생각하고 미리 걱정한다. 머리가 무거웠다. 거의 먹지 못했는데, 그 기운이 따뜻해서인지, 조그만 아이들이 옆에 붙어서 정신 없이 조잘대서인지, 순대를 잃어버린 순대국밥처럼 알맹이를 잃어버렸다고 엉엉하고 울뻔하다가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저 어느 한 쪽이 달라졌을 뿐이다, 틀려진 것이 아니라. 혹은 어느 한 쪽이 잠시 불안했을 뿐이다, 틀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길을 헤맸을 뿐이다, 돌아갈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 확고한 명제들도 잊을 만큼, 밀려드는 생각에 파묻혀 스스로마저 잠시 잃을 만큼, 나는 이토록 연약하고 불완전하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부탁할 방법 밖에 없다. 불완전한 나와, 나의 연약함을 이해해달라고, 때로 상처 받지 않으려고 되려 상처 주는 잔인함을 버텨달라고, 사유와 투쟁하는 나를 응원해달라고, 다시는 약해지지 않겠노라고. 나의 연약함은 이토록 이기적이다.
그러나 삶은 잃어버린 스스로를, 자아를 찾는 과정의 총합이므로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이유로 오늘을 포기할 수는 없다.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을 방법을 최선을 다해 찾을 뿐 오늘을 살지 않을 수 없다. 불안함 속에서도 이 포기할 수 없음이 있어서 우리는 늘 다시 이 고통에 투쟁한다. 해결하고 고이 단지에 넣어둔 생각의 뭉치 너머로 밀려드는 사유의 파도에 휩쓸린다. 썰물에 실려보낸 지난 것들과 밀물을 타고 와 해변을 가득 채운 새로운 것들 사이에서 서퍼는 용케 서기도, 옆사람을 쳐놓고 연신 사과하기도, 심연으로 고꾸라지기도 한다. 이 차디찬 담금질 속에서 나는 분명히 더 강해지고 조금씩 더 오랜 시간 홀로 오늘을 산다. 불안함이 조금씩 더 짧게 머물고, 조금씩 더 긴 시간 후에 찾아온다. 다시 약해지지 않겠다는 약속의 유효기간이 조금씩 길어진다. 땅을 단단히 디디고 선 다리들 옆에서 내 다리도 점차 더 단단히 여문다. 그 고통마저도 아름다워 인생을 사랑한다.
덕천식당 메뉴판 아래에는 큼지막하고 단호한 서체로 단정히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덕천식당 "순대국밥"은 순대가 들어 있지 않은 내장국밥입니다. 40년동안 사용한 명칭입니다.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덕천식당의 순대국밥은 다른 알맹이를 선택했을 뿐이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 글씨가 주문처럼 느껴졌다. 국밥의 운명은 국밥 스스로가 정했다. 오고 가는 수많은 오해와 투쟁하면서.
생각을 한움큼 꺼내서 담쟁이 덩굴 사이에 걸어두고 왔다. 비로소 머리가 가벼웠다. 초록빛 펜시브에 은빛 생각이 엉겼다. 넙데데한 이파리가 눈에 띄지 않게끔 금세, 착실하게, 희미한 빛을 감싸 안았다. 몇 십 년 동안 식당 건물 벽에 붙어 자라왔을 담쟁이가 빗물을 꿀떡꿀떡 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