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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담] 기특한 나

[eBook] [최근담] 기특한 나

천선란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기특한 나 - 천선란] 자신


 

눈물이 다 나네잉. 나래야 정말 잘했다이, 잘혔어. 아빠와 나는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수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고, 아빠와 나는 작은 방에 앉아서 같이 채점을 했다. 내 친구들은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글자 그대로 극혐한다. 아니, 어떻게 아빠랑 수능 시험지를 채점해? 나는 20대가 되기 전까지 만해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질문에, 그게 왜 궁금하냐? 또는 그것도 생각이냐? 하는 날카로운 반문 대신, 음. 나는 아빠! 라고 대답하는 부류의 딸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아빠랑 껴안고 뽀뽀할 수 있고, 주말이면 아빠 팔을 베고 누워 낮잠 자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아빠와 나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수능처럼 중요한 시험을 보고 와서 같이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날 나는 언수외를 합쳐서 다섯 개 문제를 틀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간 봐 온 모의고사 중에서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사탐과 일본어를 거의 말아먹었지만, 아빠는 나를 들고 동네라도 한 바퀴 돌 기세로 좋아하셨다. 서울대는 문제 없겄다, 그쟈잉. 하이고배, 우리 집 딸이 학원 하나를 안 보내도 공부를 이러게 잘 혀. 이뻐 죽겄어.


아빠와 나의 우정에 금이 간 것은 입시 결과가 발표된 직후부터였다. 아빠는 나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가차 없이 모진 말로 다그쳤다. 혼나지 않기 위해서는 우수한 딸이었어야 했다. 안간힘 덕분인지 학창 시절 대부분의 순간은 우수했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물론 많았다. 아빠는 스스로도 속상해서 펑펑 우는 딸에게, 밥상 머리 앞에서 울믄 확 거냥. 하면서 젓가락을 얼굴에 들이대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모교와 교차 지원한 한의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아빠는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나와 엄마에게, sky도 아닌디 그것이 좋아? 하향지원한 학교들 합격하는 건 당연한 거이제. 야망이 이렇게 없어서야. 연고대는 썼어야제, 과가 뭐가 중요혀. 하면서 혀를 찼다. 드디어 서울대 합격자를 발표하던 날, 모니터 속에 내 이름이 없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는 까무러쳤다. 발밑에 무릎 꿇고 빌었지만 아빠는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스무 살 이후로 몇 년 동안 재수하라는 압박을 견뎌야 했다. 얼굴만 마주치면, 너 같은 자만심 가득한 새끼는 한번 실패를 해봐야제. 아주 지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제. 같은 폭언을 견뎌야 했다. 나는 돌파하는 대신 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십 대 때 본가에서 머문 날들을 꼽으면 아마 100일에도 못 미칠 것이다. 현재의 직장에 합격해서, 아빠한테 전화했던 날도 양상은 비슷했다. 고시도 아니고. 죽을 병 걸린 것도 아닌디 몸 쪼까 아프다고 고시 포기한 놈이 말이여. 그렇게 공부했으면 그 정도야 당연히 석달이믄 합격해야제. 뭘 잘혔다고 전화를 허냐. 끊어라. 나는 아직도 가끔 그 날들의 악몽을 꾼다. 스무 살부터 스물 여섯까지 썼던 일기들에는 대부분 완벽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가득하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잘 해내고 있는지, 어딘가가 부족한 점은 없는지. 결핍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집착했고, 자만(스스로 자自, 거만할 만慢) 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그때의 나는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다. 


다행히 나는 그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자존감(自尊感)과 자기애(自己愛)는 잃지 않았다. 자신감(自信感),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 혹은 그렇게 될 것이다는 믿음은 없었지만, 그럴수록 스스로를 존중하고 품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스스로 자自, 몸 신身)을 아껴주고 사랑했다. 그런 마음들이 타인보다 내가 못났다는 자각에서 비롯될 때도 많았지만, 그마저도 없었으면 그 상황들을 견디고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며칠 전 만났던 친구 H가 자신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요소는 사랑, 그리고 당연히 특별했던 몇 명의 애인들이라고 이야기했다. 나의 자존감과 자기애를 지켜줬던 요소도 사랑이고, 당연히 연인들을 포함한 나를 아껴주는 모든 주변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 이 극복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자책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와중에도,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에게는 어떤 가치가 있는지 자문했다. 책 속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고, 자아와 화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여린 몸짓들과 만났다. 그렇게 조금씩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그리하여 믿게 되었다. 아직은 가끔 삐걱대고, 스스로를 못 미덥게 생각하는 마음이 일렁일 때도 있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 믿는다. 나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이들의 사랑, 과거에 쓰여 여전히 현재로 읽히는 고전이 연애편지로 보내오는 사랑 덕분에, 앞으로 조금씩 더 나아질 나의 모습도.


천선란 작가의 수필 <기특한 나>가 예스 24 최근담 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 수록 됐다. 이 시리즈가 최근의 최애에 관한 두근두근한 이야기를 담은 시리즈라는 측면에서, 천선란 작가가 기특한 나를 꼽은 것은 상당한 자신감과 자존감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들이 상실된 상태라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그가 잘 알고 있음을 시사한다. 혹은 그가 자신감과 자존감의 결핍을 예방할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천선란 작가가 앞으로 선보일 작품들도 무척 기대 된다. 본작은 천선란 작가가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뚜렷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해 힘들어하다가 <천 개의 파랑>으로 과학문학상에서 입상하고 인정 받게 되면서,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스스로를 기특하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축복 속에서도, 가끔 불안감에 젖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같이 작업을 하는 다른 작가가 "저는 가끔 제가 기특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리고 도전하며 악착 같이 버티고, 두려움을 이겨내 온 자신의 여정을 돌아본다. 처음으로 자신을 기특하다고 말하며, 특별한 이유 없이도, 잘하지 못해도,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는 사실만으로 삶의 가치를 이룩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결말 부분이 참 좋다.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수필을 자주 쓰면서도 수필 읽기는 꺼려 왔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안시내 작가의 작품처럼 반짝이는 문체와 내용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글이나, 본작처럼 극도로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글의 주인이 밟아 온 역사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글이나, 인스타 친구들이 쓴 자신의 현재 마음을 담담히 풀어놓은 글과 같은, 솔직하고 담담한 수필들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가 내린 결정들에 큰 지지를 받는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오늘을 살 것이다. 아빠와 나의 관계는 어떤 시간을 살게 될까. 어제에 영원히 멈춰있을 수도, 오늘을 살아내며 나아갈 수도 있다. 아빠의 반대로 K와 헤어진 후로, 잠깐 아빠와 거리를 두고 있다. 연락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으면서, 내가 아빠에게서 새로이 받은 상처를 돌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아직 다 자랐다고 하기에는 스스로에게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확인했으므로, 또다시 나를 지옥으로 몰아붙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빠가 소리 지르고 욕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K를 감싸며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고, 그가 성공한 사업가라고 항변하지 못했고, 당신이 조금만 더 나를 믿어주면 좋겠다고 작은 목소리 한 방울도 쥐어짜내지 못했다. 그토록 긴 시간 자신(스스로 자 自, 새로울 신 新)을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나의 결정을 믿고 그를 해낼 수 있기 위한 마음가짐을 갖췄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아직 아빠 발밑에 웅그려 잘못했다고 눈물 짓던 19살에서 거의 자라지 못했다. 말하자면 아빠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獨立) 하여 어른이 되어 자신(自新) 하기 위해서는 아직 더 긴 세월과 인고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나를 기특(기특할 기奇, 특별할 특 特) 하게 생각해 줄 것이다. 나는 특별한 어른이 되지 못했고, 성장을 이룩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견디어 마침내 그에 가까워지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특별하다. 보름달이 마당으로 쏟아질 듯 휘영청 밝고, 집 주변이 온통 풀벌레 소리로 가득한 추석이 되면, 집에 가야지. 아빠의 눈을 보고, 나는 내 인생을 살겠다고 이야기해야지. 그리고 그리하지 못하더라도, 또 그 다음 기회를 노릴 것이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自身)이 자신을 자신(自信) 할 때 생기는 마법을 믿는다. 그리고 그 근거는 특별하지 않지만 결코 물러나지 않는 내 삶, 내 오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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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zihee

    출근길에 발견한 댓글, 공감되는 부분도 많아서 진심으로 좋았어요, 응원해요!

    2022.11.15 09:48 댓글쓰기
    • 글쓰는헌책방

      감사합니다 :) 행복한 가을 날 보내세요!!

      2022.11.23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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