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 부리지 않은 글. 그런 담백하고 솔직한 글을 볼 때마다 고개가 숙여지기도 하고, 그 진솔함에 공감하는 부분이 커진다. 같이 세상을 사는 이야기를 하고, 불평등과 부조리에 토로하기도 하면서, 고달픈 인생을 안고 사는 힘듦을 속으로 삭이는 일들. 그런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글을 만났다. <김동식 소설집>은 글의 구석구석에서 풍겨 나오는 풍자를 그대로 확인하게 한다. (아직 <회색인간>만 읽어봤는데 분위기가 그렇다) 기묘한 상황에서도 인간 삶을 보게 하고, 대책 없는 사건 사고를 눈앞에서 지켜보게 하는데 그게 또 이해가 되는 이상한 경험. 도대체 이 소설은 뭐지?
이 소설집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작가의 이력이다. 10년이 넘게 공장 노동자로 살아온 그가 이런 이야기를 풀어놓고 독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동안 '작가'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고, 쉽게 작가가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정식으로 글을 배운 사람만이 '작가'가 되고, 글을 쓴다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그가 쏟아낸 진짜 이야기는, 글쓰기를 배우고 안 배우고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하루 노동의 끝에 써 내려간 그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마음에 들어오는 이유가 충분했다. 우리는 비슷비슷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많은 경험의 공감을 이룬다. 삶에서 부딪히는 많은 슬픔과 고통, 인간의 이기심을 충분히 겪으며 살고 있다. 그것을 작가도 모르지 않았으리라. 우리는 지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다. 당신과 내가 살면서 보고 듣고, 화내고 울고,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복기하고 있다. 더는 아프지 않고, 울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소설집의 첫 번째 작품인 『회색인간』에는 총 24편의 작품이 담겼다. 표제작 「회색 인간」을 시작으로 다른 작품들 속에서도 어이없는 상황의 세상은 계속 이어진다.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특히 첫 작품 「회색 인간」의 첫 문장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그들에게 있어 문화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그의 소설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듯하다. 「회색 인간」 속의 사람들은 갑자기 지저 세계의 인간들에게 납치당한다. 납치당한 만 명의 사람들은 곡괭이 한 자루로 강제 노동에 투입된다. 그렇게 하루하루,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있는 것이다. 그들은 늘 배가 고팠다. 하지만 한정되게 배급되는 식량, 그마저도 얼마 후에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가 된다. 이제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말 그대로 첫 문장이 귀를 후벼 파는 상황인 거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상태로 삶을 이어간다. 아무것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다. 그저 내 배고픔을 채울 수 있는 것, 내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최대의 문제였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서로를 돌봐주지 않았다. 부상을 당한 자에게 빵을 나누지 않았다. 쓰러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지상에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든,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든, 소설을 쓰던 사람이든, 이곳에서 예술은 필요가 없었다.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인간들에게 있어 예술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14~15페이지, 회색인간)
이 소설집에 담긴 작품들은 대개 이렇게 바닥을 친 순간까지의 상황에서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발현하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살면서 일상에서 만난 수많은 상황이 그대로 배경이 된다. 무인도에 떨어진 사람들의 생존 순위를 정할 때 기지를 발휘한 노인의 거짓말이 기가 막히지만, 또 그 노인의 부유함 때문에 사람들은 노인의 생존 여부를 결정한다.(「무인도의 부자 노인」) 어떻게 보면 가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그 바탕에 깔린 건 가족을 살리기 위한 이기심을 발동이라고 해도 좋을 일도 흔하게 보던 일이었다.(「협곡에서의 식인」) 돈이 많은 인간이 더한 욕심을 부리다가 돈을 주고 샀다고 생각하던 대상에게 역으로 당하는 일도 생긴다.(「스크류지의 뱀파이어 가게」)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상황 아니던가? 매주 촛불집회를 하면서 더는 말도 안 되는 갑질의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고 한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지 않아? 이 부분은 다른 작품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이승의 사망률이 낮아져서 저승에서 생기는 인구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누굴 죽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고민 끝에 이승의 인간들에게 짝을 한 명씩 맺어준다. 둘 중 한 명만 죽어도 다른 한 명이 같이 죽게 된다. 그 짝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니 함부로 누굴 죽게 할 수는 없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죽일 수 없었고, 사형도 집행될 수 없었다. 누구의 목숨이든 평등해졌다.
하지만 이제 목숨의 값이 평등해졌다. 돈 한 푼 없는 노숙자 한 명이 죽는 것으로 수백억 부자가 죽을지도 모르는 세상이었다. 어쩌면 상대적으로 가진 자들이 그러지 못한 자들보다 훨씬 더 떨었는지도 모른다. (211페이지, 사망공동체)
특히 많이 아팠던 소설은 「디지털 고려장」인데, (하아...) 현실 속의 노인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한다. 소설에서는 노인의 육체를 빼앗고 가상의 세계로 이주시킨다. 정부가 선택한 노인 문제의 해결방법이었다. 노인들이 이 제도를 거부한다고 해도 자식들은 이 제도의 장점을 생각하며 선택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한 번씩 가상 세계의 노인들을 업데이트해줘야 하는데, 비싼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업데이트를하지 않는 자식들도 많다. 업데이트가 안 된 가상 세계의 노인들은 자식들의 최근 소식을 모른다. 노인은 여전히 손주가 실제로는 고등학생임에도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가끔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가 보게 되는 게 지나가는 버스의 광고판인데, 최신 시설을 갖춘 요양병원의 개업 소식이 많더라. 이 지역에 하나둘 있던 요양시설은 몇 배로 늘었고, 또 그 요양병원의 병상을 채우는 환자도 늘어났다. 그 환자의 대부분은 노인들일 것이고... 가정에서 돌볼 수 없고, 전문가의 손에서 좀 더 나은 보살핌을 받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건 누가 노인을 돌보고 안 돌보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늘어나는 고령 인구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언제나 계속 고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나라한 현실과 어려운 대책 방안을 그대로 담아낸 소설이 아닌가 싶다.
다양한 소재로 인간 삶을 들려주는 소설들이다. 가상현실이라고는 하지만 낯설지 않고, 인간이 아닌 인간이 등장하지만, 현실 속 인간과 다르지 않은 것 같고, 불멸의 삶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대수롭지 않게 다룬다. 하지만 쉽지 않다. 인간은 주어진 조건대로 살아가기 마련이며,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으며 살아간다. 인간의 평등함을 무시하면서 돈과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대가가 따른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간절히 바라는 건 그런 거다. 작가는 현실의 우리 삶을 그대로 비추면서, 가상의 세계로 풍자와 해학을 늘어놓으며, 우리가 진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만들기를 바라는 듯하다. 부조리한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고, 권력이나 돈 앞에서도 누구나의 목숨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한다.
읽는 즐거움과 우리가 속한 세상을 돌아보는 일을 동시에 이뤄내는, 진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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