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보르헤르트를 '스물여섯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라고 한다. 너무 젊은 나이에 죽은 작가에게 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큼 그의 작품이 대단한가 싶은 궁금증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의 작품을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게으름 때문에...) 그래서인지 이 작은 책이 거대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시간 날 때마다 읽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게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단편집이다. 스물다섯 편의 단편소설과 열네 편의 시를 묶어놓았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죽기 전의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써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 책에 묶인 그의 작품은 그가 죽음을 기다리며 함께 내쉰 숨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가장 절실하게 느낄지도 모를 시간에,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내면에서 끌어올려 풀어낸 게 아니었을까.
젊은 시절 그는 전쟁터로 나갔다. 그리고 감옥으로 갔다. 특히 그가 겪은 전쟁터에서의 체험은 작품에 많이 녹아 들어있다. 해석하기 나름일지도 모르지만, 암울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이야기하고 세상에 하고 싶은 목소리를 내는 듯했다. 짧은 이야기 곳곳에 전쟁의 참상을 심어두었다. 전쟁 속에서 보이는 독일은 축축하고 어두운 분위기다. 어쩌면 그런 독일의 국민으로 살면서 전쟁까지 겪은 그의 인생도 어둡고 고독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마치 영원이라도 약속받은 양 미소 짓고 있으나 이별이, 모든 이별이 이미 우리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56페이지)
특히 이 작품들 속에서는 전쟁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게 많다. 「적설」은 몇 주째 눈 속에 앉아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미치게 한다'고 말한다. 전쟁의 긴장감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런 긴장감 있는 분위기에도 성탄절 노래가 들리는 아이러니. 그렇게 정적은 이어지고, 영원히 정적이 그들을 감싸고 있을 것만 같다. 그게 얼마나 사람은 긴장하게 하는지, 그의 표현대로 미칠 것 같다는 게 뭔지 알 것도 같다. 이 작품처럼 전쟁터에서의 장면들을 연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 대다수다. 굳이 군인으로 전쟁터에 있지 않았더라도 전쟁을 겪는 다른 신분의 사람들의 마음도 대변한다. 「부엌 시계」는 전쟁의 폭격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내의 절절한 감정을 듣는 것 같다. 어머니도 없고, 늦은 저녁에 돌아간 집에는 마주할 얼굴이 없다. 얼마나 외로워야 할지, 그 고독은 어떻게 견뎌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문장 하나하나가 슬픔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삶의 애착과 미래와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현실을 잃지도 않고 받아들인다. 무언가를 보면서 희망을 품을 수도 있는 게 우리 인간이니까, 같이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시간의 중요하고 소중함을 안다. 넉넉하지 않은 자기 생활에서도 무언가를 나눠주면서 상대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를 희망을 나눈다. 전쟁이 끝이 아니고,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간 것만도 아니므로. 이미 겪은 그 절망과 고통의 시간은 이제 지나갔으니, 이제 남은 것은 내일과 희망뿐이 아니겠냐는 듯이 들린다. 「지붕 위의 대화」에서 들려오던 그 문장. 11월의 한가운데에서 3월을 믿는다는 말이 희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인간은 치유해가면서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존재인가 싶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나 서로 함께 지낸다. 그런 다음 슬그머니 도망친다. 우리에게는 만남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이별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다. 마음이 내지르는 비명을 두려워하며 도둑처럼 슬그머니 도망친다. 우리는 귀향 없는 세대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곳도 없고 마음 줄 이도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 귀향 없는 세대가 되었다. (97페이지, 「이별 없는 세대」)
절망과 어두움으로 시작했던 소설은 희망과 내일을 말하며 끝을 맺는다. 「도시」의 누군가가 한 말을 기억한다. 인생이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쁨도 가진다고. 두려움에 빠지지 않았다는 기쁨 말이다. 뭔가 모순되고 한참을 생각해야 하는 말 같지만, 두려움만 생각하다가는 끝까지 두려움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덧붙이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두려움 안에서도 더 깊은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게 우리 아닐까 싶다는... 2년여의 시간 동안 그가 쏟아낸 작품들이 어둡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부분이다. 전쟁을 겪고 슬프고 고독했으며, 병마와 싸우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그가 과거의 어두운 시간 속에 머물지 않고 빠져나오려 애쓰던 흔적 같다. 인간에게 존재하는 간절한 몸부림 같은 공감 말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도착의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린다. '새로운 별에, 새로운 삶에 다다르는 도착의 세대'라는 문장에서 절대 무너지지 않을 인생을 살아간다.
굉장히 깔끔한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읽기도 편하지만, 그 짧은 문장이 굉장히 강한 어조로 들리기도 한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을 그렇게라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함이 묻어난다. 그가 짧은 인생에서 배운 세상과 삶의 자세를 오늘의 독자에게 이렇게 전한다.
저녁마다 그녀는 잿빛 고독 속에서
기다리며 행복을 갈구한다.
아, 그녀의 눈동자 속에 젖어 있는 슬픔,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아서다.
어느 날 밤 어두운 바람의 마법으로
그녀는 가로등이 되었다.
그 불빛 아래 행복한 사람들은
나지막이 속삭인다, 너를 좋아한다고- (191페이지, 시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