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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듣던 밤

[도서] 우리가 함께 듣던 밤

허윤희 저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3점

 

 

“이틀 연속, 꿈에 아버지가 나왔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아버지 표정이 참 애매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무 말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와 저는 할 말 가득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죠.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꿈에서 깼어요.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아버지 생전에 저는 아버지와 그렇게 마주 보고 있던 기억이 없어요. 서로의 안부를 물은 적도 없는 것 같아요. 기억이 안 나요. 그런 사이가 꿈에서 만나니 반가울 리 없잖아요. 문득 궁금해요. 평소에 서로 얼굴 보고 지낸 시간도 거의 없는데, 왜 아버지는 꿈에 나타난 걸까요? 혹시 그동안 못한 얘기라도 나누고 싶었던 걸까요? 그런데 저는 아버지와 그렇게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어색해요. 꿈에서 보는 것도 아직은 불편해요. 이런 마음을 가진 제가, 이상한 건 아니죠?”

 

이런 말들. 이상하면 이상한 대로 궁금하면 궁금한 대로 꺼내고 싶은 말이 있지만, 막상 꺼내놓자니 남들이 어떻게 볼까 봐 신경 쓰여서 결국 꺼내지 못하고 가슴에 남아 있는 말.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이 즐겁고 슬픈데, 누구한테 말하고 싶은데 별거 아닌 이야기라고 되돌아올까 봐 망설이는 말. 그런 말들이 모이는 장소가 라디오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TV보다는 라디오를 즐겨 듣는 내가 여전히 느린 사람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긴 하지만, 남들보다 모르는 게 많아서 세상 흐름에 뒤처지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내 귀가 머무는 곳이 더 좋더라.

 

 

‘사과하고 싶은데 괜찮겠지요?’

‘겁이 나지만 도전하고 싶어요.’

‘자꾸만 그 사람 생각이 나요….’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고,

필요한 건 조금 더 큰 확신이었다.

그것이 딱 한 사람의 동의일지라도.

만난 적 없는 라디오 속 DJ의 대답일지라도 말이다. (114~115페이지)

 

똑같이 들리는 라디오도 낮과 밤의 온도 차가 있다. 그건 라디오를 들어보거나 즐기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낄 테다. 특히 한밤의 라디오는, 누군가의 사연에 귀 기울여주는 느낌이 강하다. 저자가 방송하는 라디오도 밤 10시에 시작한다. (유감이지만, 나는 저자의 방송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 방송의 분위기가 저절로 느껴진다고 말하면, 좀 이상한가?) 청취자에게 들려줄 글을 적고, 사연과 음악을 고른다. 그날그날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선택되는 사연이나 고르게 되는 음악도 다를 것이다. 어떤 날은 한껏 웃긴 이야기를, 어떤 날은 한없이 우울한 사연을 고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모든 날의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는 살짝 눈물을 훔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밤에 날아오는 사연은 우리가 겪는 각자의 일상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그 두 시간, 누군가의 어깨에 내려앉은 하루의 무게를 덜어줄 수만 있다면 충분하니까 말이다.

 

 

고민 없는 삶의 평온함에 가장 감사하는 날이 있다면

아마도 가슴을 짓누르는 큰 돌덩이 하나를

내려놓은 직후일 것이다.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삶이 무슨 재미겠냐고,

여유 부리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무료한 삶이어도 좋으니 제발 이번 일만은 해결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밤을 보낸 뒤일 것이다. (94~95페이지)

 

그런 청취자의 사연과 음악이 어디 듣는 사람의 것일 뿐일까. 저자에게는 라디오 부스 안에서 보낸 모든 시간이 그냥 흐르지는 않았다. 자기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은 밤으로 만들어주는 게 저자의 능력이었으리라. 게스트 한 명 없이, 오직 저자의 목소리와 청취자의 사연과 음악으로 가득 채우는 시간이다. 저자 스스로 말한 것처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꾸준한 방송 이력만으로도 충분히 검증된 것 같다. 들어주는 사람이 진심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자기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 그렇게 저자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청취자의 이야기를 들어오면서 자기 이야기는 차곡차곡 가슴에 모아두었나 보다. 이렇게 책으로 한꺼번에 들려주는 걸 보면...

 

 

하루, 한주, 한 달의 끝과 한 해의 마지막.

어른이 되어서도 월요병 같은 순간들은 수시로 찾아왔다.

내일로 한 걸음 건너간다고 해서

뜨거운 태양이 금세 표정을 바꿀 리도 없고

새 달력의 첫 장을 넘긴다고 해서

훈장처럼 주름살을 바로 부여받는 일도 없을 텐데.

우린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을 촘촘히 나누고

경계를 만들며 그 선 위를 조심스레 걸어갔다.

이 밤이 영원하기를 꿈꾸거나

어서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47페이지)

 

어떤 날은 그날 선택된 노래 가사로, 어떤 날은 읽었던 책의 구절로 채워진, 또 어떤 날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으로 채워진 이야기. 문득 이곳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상에서 서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모여 책 이야기를 하는 이 공간과 말이다. 책 이야기를 꺼내고, 읽은 사람들에게는 공감과 다른 의견을 듣기도 하는, 혹은 읽고 싶은 책으로 찍혀 장바구니에 투척하게 되는... 보이지 않는 한 공간에 모여 서로의 관심사와 소박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곳은 흔할지도 모르지만, 그 흔한 곳에 머물며 마음을 전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요즘 유행한다는 혼자서 하기가 익숙해서일까? 혼밥이나 혼술 같은, 혼자서 해도 괜찮은 순간들을 즐기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서? 혼자 있는 공간에서 주로 듣게 되는 라디오가, 북적거리던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모두가 흩어지고 각자의 집에 있는 시간인 한밤이 주는 매력. 혼자 있지만 혼자가 아닌 것처럼 느끼게 누군가의 이야기에 꽉 채워지는 밤이 든든하다.

 

6개의 챕터로 나누어 차근차근 들려준다. 사랑과 가족, 우정, 이별, 성장, 그리움. 청취자의 사연을 배경으로 저자가 방송에서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덧붙인다. 때로는 저자만의 이야기로 누군가의 속내를 듣게 한다. 누구나의 일상이라는 생각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아프고 슬픈 사연들에, 부담 없이 우리 사는 이야기를 공유한다. 거기에 본문에 삽입된 일러스트는 글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만든다. 차분하게 듣고 있다 보면, 나도 사연 하나 보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별거 아닌 일상이지만, 뭐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좀 나눠보면 어때?

 

“내일은 엄청 춥대요. 겨울이 이래서 싫어요. 춥잖아요.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한 계절이 온 건가요? ㅠㅠ 그래도 저는 내일 이불 밖으로 나가보려고요.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러 미용실에 가요. 미루기만 했더니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거든요. 더 미루지 않으려고 예약도 해뒀어요. 오랜만에 미용실 가서 기분 전환도 하고, 칼바람 맞으면서 좀 걷기도 하고, 그러다가 도저히 추위를 못 참겠으면 카페 안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서 책도 읽고 그래 보려고요. 특별할 것 없는 계획에 갑자기 기분이 들떠있어요. 오늘 밤은 잠도 잘 올 것 같아요. ^^ ”

 

행복은 작고 사소한 것들 사이에

감춰진 보석이었다.

 

적당히 낯설고 적당히 익숙해진 카페 안 구석 자리,

고막을 타고 온몸을 풍성하게 감싸는 음악 소리,

유리컵에 맺힌 물방울과

찰랑이는 얼음 사이에 꽂아둔 빨대조차 청량한

아이스커피 한 잔,

적당히 두근대는 심장 소리,

결국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

 

그래,

이 기분이었다. (19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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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블루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요? 미안하다고 그러시나. ^^
    밤10시가 넘으면 거의 침대안에 있기 때문에 (특히 겨울에는 더 일찍부터) 라디오는 잘 안들어요. 배캠을 듣고는 요가 다녀오고 조용한 가운데 책을 읽죠.
    한밤의 라디오는 좀더 내밀한 모습들로 다가올 것 같아요.
    사연을 넣는 청취자도 그들의 사연을 말하는 진행자도 그렇고요.
    앞부분 조금 읽고 있었는데,, 느낌 괜찮네요. ^^

    2018.12.17 17:45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뻑공

      글쎄요... 미안한 걸로 따지면 피차일반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각자의 입장에서만 살아왔으니...
      저는 요즘 예전만큼 라디오를 듣지는 않아요.
      밤에 잠깐씩 듣는 정도...
      이 저자를 이 책으로 처음 알았네요.

      2018.12.18 00:06
  • 이작가

    wkf qhrhjh rkqlske

    2018.12.19 17:43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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