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본적인 욕구 중의 하나가 바로 먹는 것인데, 정말 맛있는 것을 먹는 그 순간의 환희는 무엇에 비할까 싶다. 솔직히 나는 미식가도 아니고 먹는 것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한다. 일명 ‘요리’라고 불리는 것들을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먹는 것이란, 그저 배고픔을 해결하는 간단한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길 때도 많으니까. 그저, 김밥 한 줄을 먹더라도 허기진 뱃속을 채워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그런데 여기, 그 먹는 것으로 최고의 복수를 하는 이 여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벅차다. 심장이 막 뛴다. ‘두근두근, 콩닥콩닥’이란 표현보다 더한 게 있다면 그런 표현을 쓰고 싶어질 정도다. ‘당신, 최고야.’ 라고 감히 말해주고 싶다. 요리가 그런 (복수의) 구실이 될 수 있다면 배워두고 알아둘만 하다고 생각할 지경이다.
정지원. 33세. 요리사.
그녀는 연인과의 7년의 동거생활을 접으면서 혼자가 된다. 지원과 7년을 함께 해온 남자는 지원의 요리스쿨에서 만난 전직모델과 함께 하고 싶다며 지원을 떠난다. 터져 나올 것 같은 분노를 참으며 지원은 자신이 전에 일하던 레스토랑에 취직하고 오직 요리를 위해 시간을 보낸다. 지원의 요리는 점점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요리로 인정을 받지만, 자신의 연인과 함께 키우던 개 폴리는 점차 그녀와의 시간을 거부한다. 결국 지원은 폴리를 전 연인에게 돌려보내는데, 폴리는 연인의 애인 이세연의 손에 죽게 된다.
아마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원이 누군가 대상을 정하고 복수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 연인이 떠났다고 해서 마음은 아팠지만 지원은 복수까지 꿈꾸지는 않았다. 마음 아프고 괴로워도 인생의 한 가지 상처쯤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지는 과정일 뿐이라고, 지나가면 괜찮을 거라고. 그런데 그런 생각들도 이성이 남아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 한계점을 넘어서면 속된 말로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지는 순간이 온다. 바로 그때, 폴리가 이세연의 손에서 죽었다는 그 말을 들었을 그때, 지원은 마음에 품었을 것이다. 폴리에 대한 복수, 그녀 자신이 했던 사랑에 대한 복수를. 사랑이라 여기고 행복했지만 그렇게 끝나버릴 수밖에 없었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의 보상에 대해서,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엉망이 된 그녀의 인생에 대한 복수를.
추웠던 그 겨울, 지원은 이별을 시작한다. 물론 이별은 그녀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끝을 알리는 통보를 받고 그녀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연인의 변심을 인정하는 수밖에. 하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끓어오르는 거부반응 역시 동시에 나타난다. 그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녀의 요리 밖에 없었다. 요리를 하면서 그 모든 감정들을 추스른다. 사랑도 아픔도 이별도.
나는 요리하고 사랑해야만 한다. 그것은 두 가지 일이면서 동시에 한 가지다. 이것이 내 운명이다. 칼을 높이 들어 도마 위에 잘 펼쳐놓은 오리 다리 끝을 타닥, 정확하게 내리친다.
그래, 어서들 와.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줄 테니까. - 116페이지
모든 열정과 인내와 분노를 요리에 담아내는 지원를 보면서, 오래전에 봤었던 영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 생각났다. 요리를 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모든 감정들이 요리에 묻어난다고 믿는다. 물론 요리의 맛이 그녀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건 당연하고. 슬픔의 눈물 한 방울이 요리에 첨가되면 그 요리는 쓴맛이 난다. 누군가가 먹어줄 것을 생각하면서 행복하게 만든 요리는 달콤한 맛을 낸다. ‘요리는 그런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장면들이 가득 담겨있는 영화였다. 아마 나는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정성으로 요리를 해야 한다는 말,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었던 어른들의 말씀이 뭐였는지를. 손끝에서 맛이 나는 요리는, 요리를 만드는 사람의 모든 생각들과 감정들이 그 손끝에 그대로 묻어나서 맛이 된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책의 주인공인 지원의 요리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녀가 레스토랑 '노베'에서 열정을 다해 만들었던 요리들은 그녀의 감정 그대로를 맛으로 담아냈다. 조금만 한 눈 팔거나 정신을 놓으면 바로 클레임이 들어올 만큼 맛이 달라질 정도였으니까. 그 순간 그녀는 느꼈을 것이다. 정말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고, 그 무언가를 생각하고 결정했겠지. 그리고 독자인 우리는 그 무언가가, 그 끝이 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녀의 마지막 선택에 놀라움과 동시에 쾌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녀가 취하고자 했던 행동이 결국 정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최후의 선택에 대해 아무런 거부반응도 나타낼 수 없었던 나는 도대체 뭘까. 입 밖으로 뱉어내는 한마디보다 더한 개운함이 동시에 밀려오는 건 뭐라고 설명해야 할런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결정한 일을 하는 것이다. 망설일 것은 별로 없다. 더 이상 숨죽이고 있을 수 없는, 내부로부터 부드럽게 치솟아 올라오는 메시지를 나는 듣고 있으며 물속에서도 모든 떨림을 느끼는 섬세한 해면처럼,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시킬 수 없다. 내가 깨닫는 건 나는 이 사랑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며 그건 나 자신조차 믿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 283페이지
정지원.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앞에서 최후의 만찬 같은 음식을 즐기고 있는 연인이었던 그 남자의 표정도 무척 궁금하다. 얼마나 맛있게 먹고 있을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가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정말 제자리를 찾았을까.
한편의 드라마 같다. 오래된 연인, 연인의 변심이 가져온 이별, 결국 자신의 요리가 모든 것이 되어버린 여자, 그리고 복수. 그저 그런 이야기로의 재미로 즐겨주려 했는데 마지막을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 진지해서 자꾸만 기억에 남는다. 놀랍기도 하면서, 어떻게 계속 봐줘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동적으로 계속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마구 그리고 있다. 드라마, 혹은 영화로 만들어져 영상으로 보이는 이 이야기는 어떨까 하고. 맛있는 요리를 앞에 두고 입 안에 침이 고인 모습으로 푹 빠져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