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왜 그렇게 90년대에 목말라하는지 모르겠다. 부정의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작정이나 한 듯 밀려오는 그 분위기 때문이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살아가면서 과거의 어느 한때를 추억하고 아련한 느낌으로 맞이하는 건 삶의 활력소나 기분전환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다. 나쁘지 않다. 오히려 기억하는 그 순간이 즐겁기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가장 최근의 며칠을 떠올려보면, 그 90년대의 마력이 힘들게 다가오기도 했다. <무한도전 토토가>를 보면서 그 흥겨운 분위기에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그들과 비슷한 연령대로 나이 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해서일까. 아니면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에 대한 미련 같은, 아쉬움 때문일까. 멍하니 그 시간 떠올려보다가, 단단하게 마음 접었다가, 들려오는 음악에 다 내려놓았다가... 쉽게 지워지지 않을 잔상으로 당분간 남아있을 것 같다.
때때로 음악은 특정한 시절을 소환하는 마법을 부린다. 그리고 내 경험에 의하면, 어려운 시절보다는 좋았던 시절이 소환될 때, 눈물이 왈칵 차올라서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고는 한다. 시간이 흐르면 나쁜 기억들은 사라지고, 행복했던 기억만이 남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돌아오지 않아’라는 진실을 그 어떤 바보가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이 곡을 지금까지도 듣는 이유는, 거기에 아버지와 나의 환한 미소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음악은 때로 이렇게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거는 전화가 된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된다. 나처럼 나중에 땅을 치면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잘해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다. 절대로. <46~47페이지 / 음악으로 사유하는 아티스트 이승열편>
배순탁의 『청춘을 달리다』는 그렇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90년대를 채워준 음악 이야기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이자 음악평론가인 그를 케이블에서 몇 번 본 느낌은, 다양했다. 귀여운 모범생 이미지였다가 반항기가 보이는 표정이기도 했다가... 조용할 것 같은 표정을 먼저 봤는데,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의 표정은 금방 바뀌었다. 열정. 가슴 속에 담아놓은 그 많은 음악 이야기를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은 표정으로 열심히 얘기하는 그를 봤다. 귀엽고, 재치 있고, 역시 전문가였다. 사실 그가 전문적으로 음악을 얘기할 때는 내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순간순간 들려오는 음악이 좋으면 그만인, 상황에 영향받고, 가사에 꽂히고, 멜로디에 취해버리는 내 막귀는 그의 전문성을 따라갈 수는 없다. 다만, 음악을 좋아하는 그 표정으로 공감할 뿐이다. 어떤 음악이든지 자신에게 깊게 박힌, 혹은 좀 더 애정을 갖게 되는 게 있지 않겠나. 이 책에서 그가 풀어놓은 음악인, 노래에 관한 이야기는 그 애정을 듬뿍 받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가 20대를 보낸 시간과 고스란히 함께 걸어온 뮤지션, 음악이다. 답답하고 혼란스러웠던 시절이 그에게도 분명 있었으니, 폭삭 주저앉은 집안과 묶인 것처럼 지냈던 군대생활, 사람에 대해 배우던 시절. 그를 다독였던 것도, 그를 성장하게 했던 것도, 그의 미래를 열어준 것도 음악이었다.
청춘이라 부르던 시간에 채워진 그의 음악의 발자취다. 이제 그는 청춘이라 불리지는 않지만, 인생을 계속되고 있지만, 그의 삶에 기록된 음악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음악 내공을 자랑하던 소년에게 음악이 저절로 업이 되어 가는 과정이 담겼다. 그가 스스로 흑역사라 부르는 시간에 신해철을 시작으로 이적, 윤상, 이소라, 이승환, 자우림, 언니네 이발관, 서태지, 윤종신, 유희열, 그 외 여러 가수가 함께 했다. 이름만 들어도 90년대를 가득 채웠던 가수들의 음악이 저절로 떠오른다. 배순탁은 그들의 음악을 전문적인 시선으로 풀어냈는데, 솔직히 이 책을 통해 내게 다가온 그의 음악 이야기는 전문적인 시선만큼이나 지극히 개인적인 한때를 더 보게 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도 없었을 테고, 반항이든 시행착오든 지금의 그를 채운 것은 그 음악들이었을 테니까. 그의 청춘의 기록이자 혼란스러운 시간을 버티게 해준, 잘 지나가게 해준 희망의 아이콘이었을 것 같다. 90년대가 대중문화의 황금기라고 불리던데, 그 이유도 그가 음악과 함께 하게 한몫 하지 않았을까. 그와 비슷한 시간을 살아온 나에게도, 음악의 전문성을 배제한 채로 들어도 넘치도록 좋으니까 말이다. 열다섯 명의 뮤지션이 우리의 마음과 귀를 흔들어댔던 시간이 그대로 살아나고 있다. 좋아하는 노래만 따로 골라 녹음해놓은 것처럼 한곳에 모아둔 앨범 같다. 치열하게 달리던 시절, 힘들게 버티던 순간들이 지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에 음악이 있다는 듯, 그 힘을 자랑한다. 무슨 공연이 이런가 싶었던 크라인 넛, 음악에 담긴 메시지로 성장을 만든 신해철, 아픔의 감정에 푹 빠져도 좋다는 무언의 말을 건네는 이소라, 평생 아껴서 듣고 싶다는 윤상의 음악은 또 어떻고... 힘든 시간에 힘들게 들었던 음악이어서 더 귀에 남아있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저자의 음악 이야기가 어떤 ‘앓이’를 시작하듯 찾아온다. 이 책의 제목처럼 청춘에 머물지 못하는 시간이 우리를 앓게 하는 건 아닌지.
그날 이후로 방송을 제외하면 <No Surprises>를 부러 듣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라디오헤드의 <No Surprises>를 다시, 겨우 들어냈다. ‘들었다’가 아니라 겨우 들어‘냈’다. 문법에 맞지는 않지만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 다들 하나씩은 있지 않은가.
소중한 의미를 지녔던 무언가가 점점 색이 바래고 소멸되어 가는 게 무서워서, 생기발랄한 시대를 함께했는데 그것이 잊혀지는 게 두려워서, 아니, 사실은 그렇게 잊어가는 내 자신을 바라보는 게 싫어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
그런 사람, 그런 음악, 다들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262~263페이지)
가끔은 싫어도 좋은 척, 안 괜찮은데도 괜찮은 척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지금의 우리를 위한 마음 풀어놓음이 아닐까 싶다. 나이 들어가며 주름이 늘고, 몸은 D라인이 되어가도 놓을 수 없는 어떤 낭만을 저자는 이렇게 들려준다. 자신의 시간과 함께 한 노래, 가수를 풀어내면서 지나간 청춘에 안부를 묻는다. 자신이 그려온 한 편의 드라마의 BGM처럼 오늘도 자신을 버티게 해주는 한 장면으로 찍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