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창 인기인 TV 프로그램 <복면가왕>을 좋아한다. 공감하며, 즐기며, 기분 좋게, 그냥 듣는다. 가면 속 인물이 누군지 알 것 같은 경우도 있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그들의 정체가 더는 궁금하지 않다. 그냥, 노래를 듣는 게 전부다. 노래가 끝나고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은 가면을 벗는다. 뮤지컬 배우, 코미디언, 가수의 꿈을 이루지 못한 배우, 다시 무대에 서고 싶어 힘을 얻고 싶은, 한때 잘 나가던, 가면을 쓰고 자유롭게 노래하고 싶다던 가수. 많은 분야의 사람들이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나와 오직 목소리와 음악으로만 들려주고 평가받는다. '인기라는 편견을 버리고 진정성 있는 노래로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가수가 진정한 가수'로 자리할 수 있는 무대를 희망하는 게 이 프로그램의 취지라고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보고 느끼기에 그 취지가 충분히 전달된 듯하다. 더는 가면 뒤의 얼굴이 궁금하지 않으니까, 오직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싶다는 바람만이 남았으니까 말이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이가 오직 노래 하나만으로 평가받는 게 당연한 건데, 온전히 노래 하나만으로 듣지 못하게 하는 배경이 이들을 가면 쓰고 무대 위에 오르게 한 건지도 모른다.
백지상태에서 배울 때 습득력이 좋다고 했다. 아무런 정보 없이 그 노래만 듣는 게 감상의 시작인 것처럼, 아무것도 끼어들지 않은 상태로 익히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잘 배우는 거라고.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배우는 데 있어 이미 정해진 기준이나 주변의 목소리는 누군가 그려놓은 그림 위에 다시 그린 그림으로 남겨진다. 오롯이 내 것이 아닌 거다.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젬과 스카웃이 보는 세상도 그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내 지울 수가 없었다. 이미 앞선 사람들이 정해놓은, 비상식이 상식을 지배하는 세상을 보며 혼란에 빠진 이 아이들에게,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한층 성장한 듯 보이는 3년이란 시간에 세상을 보는 눈과 지혜를 가졌을 스카웃을 기대해보는 마음으로 민망함을 누르곤 했다.
1930년의 미국 대공황의 시대. 앨라배마의 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혼란의 시기이면서 계층 간, 인종 간 차별이 심했던 그곳의 이야기를 어린 여자아이 스카웃의 성장의 시간 3년이 함께했다. 작은 동네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의 모습, 은둔하며 지내는 부 래들리를 향한 궁금증, 학교에서 배우는 것의 진정성, 어른들이 하는 사고를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것. 많은 것이 스카웃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 그 이해하지 못함이 단순히 어른과 아이의 시선 문제는 아니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편견과 인권의 문제가 어린 스카웃의 눈에 올바르게 비치지 않음은 당연하다. 모든 일에 있어서 옳고 그름의 기준이 피부색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너희 아빠 말씀이 옳아," 아줌마가 말씀하셨습니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174페이지)
가만히 듣고 있자면,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대부분 문제는 기존에 만들어놓은 편견과 이미 없어진 노예제도까지 은근히 계속 이어오면서 인종차별과 우월감이 만들고 있다. 자신의 욕심과 이익을 위해 인간이 부리는 횡포가 지금도 다를 바는 없지만, 그 힘을 만들어주는 게 사람 사이의 차별이라는 게 공포로 다가온다. 그런 게 익숙해지면 그다음에는 또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지 못한 삶으로 밀어 넣으려는지 두려운 거다. 그래서 어린 스카웃의 눈에 비치는 그 마을, 어른들의 모습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불평등과 불이해의 세상에서 보고 자라는 아이의 시선 변화가 가져올 그 무엇이, 어떤 작용을 하면서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지 보게 한다. 법정에서 정의를 찾으려 변호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흑인 구역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고 예배를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을 키우면서, 이 아이가 가슴에 품게 될 것을 그려본다. 지금 그 어른들이 사는 세상과 이 아이가 자라면서 보고 배우고 느끼면서 쌓은 것으로 살아갈 세상이 어떻게 다를지 기대하게 한다.
소설 속 스카웃의 '왜?'라는 물음들에 선명한 답을 주지 못하는 건, 이미 겪어온 것들이 만든 가치관이나 고정관념 때문인 거다. 그저 다를 뿐인, 다르다고 해서 불편을 주거나 해를 끼치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아서 생기는 일들에 저절로 물음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어린 스카웃이 이해 못 하는 세상으로만 머물지 않기를 내내 바라면서 읽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협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흑인을 변호하며 무죄를 주장하고 진범을 가려내려 애쓰던 아빠의 정의로운 모습이 스카웃에게 전할 무언의 메시지가 읽히고 있어서다. 세상에는 피부색 때문에 차별당해야 하는 것도, 범죄자로 찍힐 이유도, 열등감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 소설이 빛난다. 아빠의 말처럼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되는 일인데, 그걸 자주 간과해서 생기는 일들을 이 소설이 말하고 있다. 소설의 끝 부분에서 스카웃이 부 래들리의 집 앞에서 서서 본 세상이 다르듯이, 서 있는 자리를 조금만 옮겨보면 될 것을.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64~65페이지)
무엇이 우리 눈에 막을 하나 씌우고 있는지 보게 하는 소설이다. 살아온 환경이나 경험, 여러 사람의 말이 직접 부딪히지도 않는 것들에 대한 개념을 만들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런 개념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못 보게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와 고통을 만드는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의 화자가 어린아이라는 점에서 더욱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3년의 세월이 스카웃에게 만든 시선으로 이 소설의 의미가 커진다. 결국, 이 소설이 하고 싶은 말도,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봐야 할 것도 같은 거다. 타인을, 세상을 향한 시선의 변화가 만들 어마어마한 것을 찾게 하는 것. 소설의 분량만 보자면 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을 접하는 연령대가 많이 어렸으면 좋겠다. 스카웃처럼 초등학생의 나이로 읽기는 힘들겠지만, '어른이 되기 전에 만났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만들기도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