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설에 관한 호기심은 단 한 문장으로 충분한지도 모른다. 레일라 슬리마니의 이 소설처럼 말이다. 몇 초 만에 죽었다는 아이의 존재를 알림으로써 독자의 눈을 사로잡을 준비를 이미 마친 거다.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 고통은 없었다고 의사가 분명하게 말했다. (9페이지)
마치 남의 일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문장의 섬뜩함을 나는 읽는 내내 느꼈다. 누군가의 행복하고 안정된 시간 속에서 누군가는 불안을 잠재우고 그들의 행복 속에 잠깐 숨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으로 둔갑하지는 않는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 되는 일. 그러니 루이즈의 이런 몸부림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눈에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루이즈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아는, 그가 좋아하는 일로 행복이라 착각한 그 시간에 잠시 머물 수만 있다면 더한 것을 했을지도 모른다.
미리암과 폴 부부는 아이의 탄생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만, 미리암은 그녀의 경력 단절과 불안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아이 때문에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이런 걸 보면 우리나라나 외국이나 아이의 양육 문제는 똑같은가 보다) 아이를 데리고 나갔던 그 길에서, 후줄근한 모습으로 전 동료를 만났을 때는 더욱 좌절했다. 그러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자 보모를 구하기로 한다. 그들의 요구조건에 안성맞춤인 루이즈가 보모로 고용되고, 루이즈는 미리암과 폴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그들 가정에 최적화된 인물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루이즈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미리암이 잘하지 못했던 집안일까지 완벽하게 해낸다. 우렁이 각시도 이런 우렁이 각시가 없을 것 같다. 미리암 가족은 점점 루이즈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가만 생각해보면 루이즈는 미리암 가족의 행복을 영위하는데 희생되는 인물인 것만 같다. 루이즈의 존재가 미리암 가족에게만 도움이 되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독백처럼 들려오는, 루이즈의 지난 시간과 현재의 삶이 하나씩 드러나듯 들려올 때마다, 미리암 가족은 루이즈의 도피처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루이즈에게 아이들이란 무엇일까 계속 생각하면서 들여다보게 되는데, 결국 아이라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거였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기의 존재가 없이, 타인의 삶 속에서 사랑을 알아가는 비정상적인 방법만이 남아 루이즈의 삶을 채우고 있었다. 누군가의 웃음, 누군가의 아이로 나의 행복이 이뤄질 거로 믿는 일. 어리석지만 그것이라도 붙잡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대변하는 게 루이즈의 모습이 아니었는지 자꾸만 고민하게 된다.
두 아이가 살해되면서 시작된 한 가정의 무너짐과 완벽하게 보이던 보모의 인생이 한꺼번에 들려오면서, 누구도 관심 두지 않았던 한 사람의 인생이 드러난다. 완벽하게 감추고 있던 한 사람의 인생과 폭력성이 어떻게 촉발되는 지까지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심에 아이가 있다. 아이에게 보내는 마음과 관심이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지 증명하면서, 또 다른 면에서는 아이를 잃을까 두려운 부모의 불안이 공존한다. 은근한 심리전 같으면서도, 전혀 드러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은 어디까지 허락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도 자아낸다.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의 진실을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살인을 저지른 보모에게?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아니면, 오랜 시간 루이즈와 얼굴 봐왔지만, 아는 게 하나도 없던 다른 보모들에게?
여자를 이야기하면서, 조금 더 넓게 바라본 세상의 한구석의 어둠 같은 이야기를 동시에 드러내는 소설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의 모습은 어디까지인가 지켜보게 하면서, 그렇게 모르는 타인인 채로 살아가는 우리가 맞는 방식인가 또 한 번 고민하게 한다. 물론, 미리암과 폴이 자기 보모의 모든 인생을 알 필요는 없다. 다만, 고용된 사람으로만 바라보는, 자기들의 불편을 해소해주는 도구처럼 여기기보다는, 인간적인 관심과 시선으로 봤더라면 이들의 관계나 결말은 혹시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더욱 궁금하고 확인하고 싶어지는 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다. 왜 보모는 아이들을 살해하게 되었는지 하는 과정을 보고 싶은 거다. 소설의 흐름으로, 현재의 사건이 과거를 되짚어 오면서 보여준 루이즈의 환경을 말해주는 데도 다 알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오히려 그게 우리가 찾을 답인 듯하다. 타인에 대해, 타인이 쌓아온 시간에 대해 우리가 다 알 수도 없고, 안다는 게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에둘러 말하는 느낌이다. 우리는 누구나 고독하며, 그 고독을 끌어안고 사는 인생일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그 고독을 해소해줄 무언가가 간절히 필요하기도 하다는 것을.
고독은 꼭 마약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마약을 안 하고 싶은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루이즈는 얼이 빠진 채, 눈이 쿡쿡 쑤셔올 만큼 크게 뜨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고독 속에서 그녀는 사람들을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진짜로 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이 그 어느 때보다 구체적으로, 진동이 느껴지고 손에 만져졌다. (128페이지)
아프고 외로웠던, 그래서 더 타인의 삶에 들어가 소속감과 따뜻함을 느끼고 싶었던 한 여자의 인생이 가슴 쓰리다. 모든 것들로 거부당하는 느낌이 아마 그럴까 싶어서 서럽다. 다른 이들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 같은 것들이, 나에게는 찾아오지 않는 기적 같은 순간으로 여겨지는 순간 이성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다. 루이즈가 보여준 건, 그런 기적이 비껴간 순간들이다. 내가 모르는 타인에 대해 영원히 모를 우리들의 시선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세상의 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