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가 흩뿌리고 가는 가을 밤 차창 너머 희뿌연 불빛 아래 소년과 소녀는 말없이 손을 잡고 걷는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숨을 죽이고 내려다보며 그들의 가슴 속 속삭임을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가슴 속을 뚫고 스쳐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마음은 울고 지금껏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반문하는 가운데 시 한 편이라도 읽어 딱딱해진 가슴을 말랑말랑하게 펴보리라 마음먹고 시 읽는 밤을 구매하였다. 흑색과 백색이 간명함을 더하는 시인의 감성이 녹아든 시들은 기존의 시와는 차별화된 짧음으로 선문답 같은 형식에 정서를 담았다.
엄마 뱃속에서 모성이 이끄는 대로 받아먹고 지내다 유영하던 시간을 끝내고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되는 숱한 만남 속에는 생각만 하여도 가슴 뛰게 하는 상대가 있다. 익숙지 않아 잘해주고 싶은 마음만 앞섰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라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정형화된 틀은 깨지고 새로운 시도 아래 또 다른 인연은 이어졌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여기면서도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사소한 행동이 이별로 이어졌다. 시인 역시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지고 난 뒤 이 시들을 쓴 것처럼 보인다.
‘니가 있을 땐 /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랐었다.
니가 떠난 후 /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을 잃고 시를 쓴다던 시인의 처연한 표정이 그려져 마음이 가볍지는 않지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동안 서로에게 걸맞은 연인을 만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이별하기 싫어서 이별을 미뤘던 일들을 떠올리며 이별을 공부 같다는 시인은 너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손을 내밀었던 이가 정체성을 찾고 싶다며 떠나갔을 때의 실연의 틈은 아물기 힘든 구멍을 내고 말았다. 심장 한가운데 깊게 패인 구멍은 어떤 것으로도 메워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 속에 또 다른 감정으로 채워지고 힘든 시간을 견뎌내게 한다.
우연한 만남이 필연적 사랑으로 이어져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 시간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관행대로 행하며 서로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을 때 이별은 스멀스멀 기어든다.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기 싫은 생각에 괴로움을 피해 외로움을 선택하는 게 이별이라는 시인의 표현대로 힘들어도 함께 견디며 그 시간을 보내려는 의지가 끼어들 여지가 없을 때 우린 이별을 생각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해지는 부음(訃音)은 살아온 세월이 살아갈 날들보다 길었음을 증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숱한 이별을 겪으며 가슴에 묻어 둔 이들을 끄집어내 추억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그리움의 대상이 늘어났다는 것과 변질된 자신의 이면에 자리하는 순수성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일 것이다. 잊고 지낸 예전의 나로 회귀하여 그 시절의 만남을 복원한다면 지금보다 더 잘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에 불을 지피는 늦가을의 정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