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보금자리를 향한 절박한 생존 본능
- 베른트 하인리히, 『귀소 본능』
베른트 하인리히가 지은 『귀소 본능(The Homing Instinct)』(이경아 옮김, 더숲, 2017)은 ‘우리는 자기 집을 어떻게 찾아내고 그것을 어떻게 자기 집으로 인식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집’이라는 공간은 일반적으로 아늑함과 편안함을 주는 곳으로 인식된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귀향(歸鄕)’ 현상을 생각해 보라.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자동차로 꽉 찬 고속도로에서 허비하면서도 사람들을 귀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귀향을 하면 삶이 달라지는 것일까? 아니다. 귀향하는 사람들의 삶이 특별히 달라질 리는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자동차가 넘쳐나는 고속도로로 나선다. ‘귀향’이라는 말에 새겨진 ‘귀소 본능’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들만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연어는 알을 낳기 위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향한다. 태어난 곳으로 가는 과정에 펼쳐지는 온갖 고난들을 헤치며 연어는 기어이 고향에 이른다. 그곳에서 알을 낳고 생을 마치는 연어의 삶을 보면, 생명에게 귀소 본능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는 본질적 요소로 보이기도 한다. 지은이는 ‘우리 시대의 소로’ ‘현대의 시튼’으로 불리고 있다. 소로와 시튼은 자연주의자, 혹은 자연학자로서 이름난 사람들이다. 시튼이 자연 속 생명들을 관찰함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의 신비를 전해준 자연학자였다면, 소로는 문명의 바깥에서 자연과 더불어 산 자연주의자였다.
지은이는 자연을 삶터로 하여 사는 다양한 생물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관찰은 의문을 만들어낸다. 해결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진 실험은 그 의문을 풀어준다.”(45쪽)는 파브르의 말을 따라 지은이는 주변 생물들을 대상으로 여러 실험을 수행한다. 자연 속 생명들에 대한 실험이므로 주로 ‘관찰’이 주가 된다. 직접 눈으로 본 사례를 데이터로 전환하여 그는 생명 활동의 근원을 형성하는 ‘귀소 본능’의 의미를 과학적으로 탐구해 들어간다. 생물에게 귀소 본능은 생존 본능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를테면 지은이는 알래스카에서 호주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비행하는 큰뒷부리도요를 관찰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쨌든 새들은 왜 떠날까? 또 그렇게 멀리까지 날아가는 이유는 뭘까? 녀석들은 어째서 궁핍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고된 여정에 나서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녀석들은 그렇게 단기간에 살을 찌워 머나먼 목적지까지 가는 연료로 삼는 걸까? 무엇이든 집어삼킬 듯한 강력한 식욕만이 녀석들의 살집을 키우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비행 욕구만이 녀석들을 떠나게 하고 쉼 없이 날도록 만들 것이다. 북극지방의 여름은 남쪽보다 더 많은 먹이를 제공해주는 반면 겨울에는 먹고 살 만한 것이 거의 나지 않는다. 그런 환경적 조건 때문에 녀석들의 욕구와 행동 역시 거기에 맞춰 진화했으며 수많은 종의 생명체가 그런 서식지에서 편안함을 느끼도록 적응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절박한 필요성 때문에 새들의 대규모 이동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114쪽)
큰뒷부리도요는 한 번 비행에 뇌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신체 부분이 소진된다고 한다. 말 그대로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그들은 새로운 서식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곳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장소가 아니라면 이 새들이 이런 모험을 감행할 리 없다. 지은이는 자연 속 생물들이 펼쳐내는 신비로운 장면에서 진화의 법칙을 본다. 진화는 주어진 환경에 적절히 적응한 생명이 살아남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벌들이 왜 꿀이 있는 장소를 동료들에게 알리는 춤을 추게 되었을까? 집을 나온 생물들은 어떻게 집으로 가는 길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것일까? “정교하고 아름다운 동물들의 건축술”(181쪽)이라는 지은이의 말에 드러나는 대로, 동물들은 어떻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지은이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쉽게 파악하기 힘든 질문을 계속해서 던진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했다고 서슴없이 주장하지만, 우리 인간이 모르는 일들이 지금도 자연에서는 벌어지고 있다.
동물들의 집짓기를 이야기하며 지은이는 ‘사회성을 띤 동물들의 공동주택’에 주목한다. ‘집단베짜기새’를 비롯한 여러 동물들을 대상으로 하여 서술되는 ‘공동주택’ 이야기는 “경쟁자일 수도 있었던 이웃이 ‘조력자’가 되는 결과를 낳으면서 고양된 사회적 관용”(285쪽)이 동물 세계에서도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은이는 ‘진(眞) 사회성’이라는 개념으로 동물 세계의 사회적 관용을 설명한다. ‘진 사회성’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통의 이익을 위해 전문화된 과제나 일을 함께 수행하는 곤충사회의 한 유형을 가리킨다.
동물이 공동주택에 모여 사는 이유는 먹이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혼자 사는 것보다 어울려 사는 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동물들은 공동주택에 산다는 의미이다. 인간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인간은 특히 미성숙한 상태로 생활하는 기간이 다른 동물보다 길어서 이러한 ‘공동주택’에 대한 필요성을 그만큼 절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아늑하고 편안한 ‘집’을 향한 욕망에는 생존을 향한 절박한 본능이 숨어 있다는 걸 이로써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하겠다.
탈출 경로가 제한된 나무 위에서 침팬지 무리가 원숭이 한 마리를 추격할 때 녀석들은 이런 탈출 경로를 차단하기 위해 원숭이를 에워싼 뒤 ‘손으로’ 원숭이를 잡는다. 하지만 그런 사냥은 인간이 진화해온 사방이 트인 서식지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런 곳에서는 오랜 추격이 필요하며, 거기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게다가 설명 영양을 죽였다고 해도 쉽게 눈에 띄는 먹이는 우리보다 힘이 센 사자, 표범, 하이에나, 개 떼 같은 육식동물에게 빼앗길 수도 있었다. 사냥감을 이용하려면 그것을 가족이 살아가는 공간이 ‘집’으로 가져와 보관하거나 요리해야 했다. 절벽면에 뚫린 구멍이나 동굴 같은 은신처의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유인원과 같은 존재들 사이에서 어떠한 사냥 문화도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은 입구를 지키는 데도 이용됐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은 관리가 필요했을 테고, 불이 마련해준 안전한 집은 두더지쥐, 벌, 흰개미를 비롯한 그 밖의 모든 사회적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업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했을 것이다. 가장 힘이 세고 잘 달리는 인물은 사냥감을 쫓아 나섰다. 그보다 능력이 덜한 존재들은 안전을 위해 집에 머물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불을 관리하고 고기를 처리하거나 요리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었다. 결국 따뜻한 온기를 품은 난롯가가 곧 집이 되었다. (380~1쪽)
지은이는 인간의 ‘집’을 ‘불’과 연관시키고 있다. 인간이 불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지은이는 우선 물리적으로 강한 짐승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힘을 불이 인간에게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불을 피움으로써 동물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지은이는 인간이 화식(火食)을 함으로써 두뇌 발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불이 고열량음식의 소화를 촉진시켜 인류의 두뇌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 셈이다. 불은 인간만이 다룰 수 있다. 사냥을 하고 돌아온 인간은 집안에 불을 피움으로써 외부와 차단된 ‘따뜻하고 안전한 집’을 소유한다. 인류의 조상(불의 사용 시점을 지은이는 10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으로부터 내려온 이 마음이 때가 되면 이루어지는 ‘비합리적 귀향’을 설명하는 유전적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따뜻한 집으로 귀향하려는 생물들의 ‘귀소 본능’만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생물들은 집을 떠나기도 한다는 점을 그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인간으로 따진다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개척민들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한 곳에 정주하려는 욕망만큼이나 새로운 곳을 개척하려는 마음 역시 크다. 하지만 집 밖에 나간다고 해서 ‘따뜻한 집’에 대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지은이는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우주인의 마음을 예시로 든다. 우주인에게는 지구 전체가 ‘보금자리’로 보인다. 그는 좁은 의미의 고향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고향과 만난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생물들은 이렇게 떠남과 돌아옴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려는 생존 본능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귀소 본능’은 생명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들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해도 무방한 셈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