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지 않을 권리, 복종하지 않을 권리
- 러셀 프리드먼,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버젓이 살아 있는 시대에 나치를 ‘악랄한 독재정치’로, 히틀러를 거짓말쟁이이자 신성모독자로 맹비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이미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끔찍한 고문을 당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목숨을 걸지 않고 폭압적인 정권에 대항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나치에 저항한 학생들이 있었다. ‘백장미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이들은 나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인간에게는 침묵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주었다.
러셀 프리드먼은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두레아이들, 2017)에서 히틀러에게 저항한 학생들의 모임인 백장미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히틀러의 전제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로베르트 숄의 자녀들인 한스 숄과 조피 숄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바람을 어기고 한스가 열네 살 때 히틀러 청소년단(히틀러 유겐트)에 들어가는 데서 시작한다. 열정에 불타는 10대들을 애국심으로 응집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10살이 되면 누구나 히틀러 청소년단에 입단해야 했다. 제 열정을 못 이기는 아이들만큼 다루기 쉬운 존재가 있을까? 나치는 아이에서 성인까지 ‘독일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어내려 한 셈이다.
하지만 히틀러 청소년단 5만 명이 참석한 전당대회를 본 후 한스는 곧바로 고민에 빠진다. 그는 “참석자 전원에게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복종하기만을 강요했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23쪽) 그곳에서 한스는 오로지 독일 노래만, 그것도 나치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노래만 불러야 했다. 개인의 자유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청소년단에 대한 비판의식은 자연스레 나치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유대인이 쓴 책이나 나치가 지향하는 세계와 다른 내용을 표현한 책이라면 모두 금서가 되는 시대였다. 나치에 비판적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한스와 조피를 비롯한 로베르트의 자녀들은 금서로 지정된 책을 몰래 읽으며 나치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워나갔다.
‘d.j.1.11(11월 1일의 독일소년연맹 약자)’이라는 청소년 지하단체에 관심을 보인 한스는 몇몇 친구들과 그 단체의 지부를 결성했다. 이 단체 회원들은 히틀러 청소년단과 마찬가지로 소풍도 가고 야영도 했지만 각자의 취향을 서로 존중했다. 나치가 금지한 책을 돌려가며 읽었고, 세계 곳곳의 노래를 거침없이 불렀다. 조피도 한스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독일여자청년동맹에 입단한 조피는 나치의 이야기에 결코 속지 않았다. 그녀 또한 한스처럼 금서를 읽으며 나치가 지닌 본질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게슈타포의 대대적인 단속 작업에 휘말려 이들은 게슈타포 본부로 끌려가는 일을 겪기도 했지만, 결코 자신들의 신념을 포기하는 일 따위는 벌이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이들은 나치에 대한 비판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어 ‘책임감이 있는 시민이라면 독재 정권 아래서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가?’에 대해 그들은 끊임없이 토론했다.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1939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폴란드에 있는 죽음의 수용소와 소련에서 벌어진 유대인 대량 학살을 둘러싼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았다. 한스와 그 친구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토론만으로는 나치를 몰아낼 수 없다는 걸 그들은 깨달았다. 1942년 6월 말, 나치를 반대하는 전단이 처음으로 뮌헨 지역 우편함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단에는 ‘백장미단의 전단’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정직한 독일인이라면 이 정부를 수치스럽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전단은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서구 문화의 구성원이라는 책임을 인식하고 최대한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인류의 재앙에 맞서, 파시즘에 맞서, 전체주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든…… 너무 늦기 전에, 콜로뉴 같은 도시가 또 다시 잿더미 속에 드러눕기 전에, 이 나라의 마지막 남은 젊은이가 인간 이하의 오만함 때문에 전장 어딘가에서 피 흘리며 죽어 가기 전에 저항, 저항하십시오.” (61쪽)
“인류의 재앙에 맞서, 파시즘에 맞서, 전체주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전단을 통해 그들은 저항을 외쳤다. 더 많은 사람들을 살육하기 전에 나치를 끝장내야 했다. 그해 여름에만 세 차례 더 백장미단의 전단이 도시에 뿌려졌다. 네 번째 전단에서 그들은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나쁜 양심입니다. 백장미단이 당신을 절대 평화롭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71쪽)라고 선언했다. 학생들의 소망이 깊어서였을까, 시대적 상황도 나치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소련을 침공한 나치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참패했다. 독일군 42만 명 가운데 겨우 9만 명만 살아남았다.
철학과 교수인 쿠르트 후버의 도움으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전단이 만들어졌다. 후버가 쓴 여섯 번째 전단은 독일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히틀러의 광기를 비꼬는 내용이 실렸다. 나치를 비판하는 전단이 계속해서 뿌려지자 게슈타포가 나섰다. 반역자로 낙인이 찍히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목숨을 내걸고 전단을 뿌려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셈이다. 전단 작성자를 추적하는 특별 수사대가 꾸려졌고 용의자에게는 포상금이 걸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백장미단의 활동은 위축되지 않았다. 단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렉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사를 받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상관없었습니다. 국가사회주의와 맞서 싸우고 싶다는 욕구가 (죽음의 두려움보다) 더 강했으니까요.”(93쪽)
뮌헨 대학에서 전단을 뿌리던 한스와 조피는 건물을 지키는 수위에게 발각되어 게슈타포에 넘겨졌다. 둘은 무죄를 주장했지만, 게슈타포 요원들이 남매의 방을 뒤져 ‘반역’ 증거들을 찾아냈다. 곧바로 재판에 회부된 이들에게는 ‘이적죄와 국가반역죄’라는 죄명이 붙었다. 수석판사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이들에게 단두대형을 선고했다. 말 그대로 목을 자르는 형벌이다. 처형도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조피가 먼저 단두대에 올라 목이 잘렸고, 그 다음은 한스 차례였다. 스물한 살 여자와 스물네 살 남자는 이렇게 죽었다. 한스는 마지막 순간에 “자유여 영원하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나치는 반역을 이유로 젊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들의 정신은 또 다른 이들로 변함없이 이어졌다. 게슈타포가 이들을 잡으면 잡을수록 더 많은 이들이 백장미단 이름으로 활동을 했다.
조피는 처형당하기 전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한 일은 큰 파도를 이루게 될 거예요.”(125쪽)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조피는 죽음으로 무엇을 지킨 것일까? 침묵하지 않을 권리다. 다른 말로 하면 복종하지 않을 권리이다. 나치는 1945년 5월 7일 연합국에 항복했다. 나치가 항복하기 일주일 전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치에 저항한 백장미단 이야기는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한국인들을 자꾸만 떠올리게 한다. 나치에 순응하는 자가 있었고 저항하는 자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제에 저항하는 자가 있었고, 순응하는 자가 있었다. 역사는 권력에 순응하는 자가 만들지 않는다. 역사는 권력에 저항하는 자들이 만든다. 권력에 저항하는 자들은 침묵하지 않을 권리를 스스로 실천했다. 시대가 변해도 자유를 향한 열망을 사람들은 결코 잊지 않는다. 자유는 침묵하지 않을 권리에서 나온다. 우리는 지금 그 자유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며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